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66

살아있는 것들 / 박수호

살아있는 것들 박수호 햇빛 한 줌 바람 한 가닥 받고 또 받고 주고 또 주고 살아 있는 것들은 저렇듯 누군가에게 기대어야 산다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지고 길은 길에서 만나게 된다.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지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삶의 질도 결정된다고 배워왔지요. 성적이 우선이라는 빚 독촉 같은 1등 지상주의와는 별개로 책 속의 이론적인 사회관계를 배우면서 어른들의 이율배반을 체험하며 성장해 온 세대의 불행은 관계에 대한 또는 소통에 대한 끝없는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2등이 용납되지 않는 건 나만 있고 타인은 없다는 가르침 아니고 무엇일까요. "햇빛 한 줌 / 바람 한 가닥"도 주고받으며 조화를 이루며 산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를 놓아야 보이는 것입니다. 우..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 며느리도 봤응게 욕 좀 그만 해야 정히 거시기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 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 ​이런 꽃 같은 !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 ​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내가 바라보는 대로 세상은 나에게 다가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매번 연말부터 새해만 되면 갖가지 공약들을 자신에게 쏟아내곤 하지요. 마치 그것이 한 해를 마감하고 다시 한 해를 시작하는 의식이나 통과의례처럼 말입니다. 작심삼일도 이쯤에선 무안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때쯤이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라는 물음을 다시 던지지 않을 수 없고, 다시 새로운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습니..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이면우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드러내지 못하는 슬픔을 읽어내는 일 모든 슬픔의 깊이는 다릅니다. 모든 슬픔의 무게는 같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한사코 가볍게..

놀랜 강 / 공광규

놀랜 강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고향의 향수마저도 콘크리트 잿빛으로 바뀌고 60년대 말 70년대 초 서울 노량진역과 역 너머 여의도 샛강은 우리들의 흥겨운 놀이터였습니다. 철길 위에 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기길 기다리고, 지루하면 샛강으로 내려가 버들치며 붕어를 잡기도 하였지요. 국립묘지 앞 동작대교 아래 ..

망월동 / 김수열

망월동 김수열 인자 울지들 말어 다시는 이런 아픔 없도록 진상 밝히고 책임자 처벌하려면 맘 다부지게 먹어야 써* 1980년 오월 고등학생 아들을 잃은 하얀 소복의 광주 오월 어머니가 2014년 사월 고등학생 아들을 잃은 노란 리본의 세월호 어머니 손을 잡고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 합니다 일명 잔인한 4월이 갔고, 현대사를 거치며 더 잔인해진 5월도 갑니다. 5월의 따스한 바람 속에는 장미가시가 숨겨있어 울컥울컥 슬픔이 목구멍을 치받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슬픔이 슬픔을 위로 합니다. 슬픔이 슬픔의 겨드랑이를 끼고 젖은 세월을 동행 합니다. 진상이 밝혀지면 죽은 아들이 살아 오냐는 비아냥은 죽인 자들의 쓰레기 같은 명분일 뿐입니다. “1980년 오월 / 고등학생 아들을 잃은 ..

음악 / 이경임

음악 이경임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 몸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 철사 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른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 뼈 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단한 것이 강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비중이 높은 것일수록 단단하고 잘 부러지지도 않는다고요. 하여 자존심 강한 사람, 강인하고 강직하고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왔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존경받아 마땅한 시대도 있었구요. 아마도 약소민족의 비애가 DNA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남자는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는 무생..

들풀 / 민병도

들풀 민병도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 누가 이 땅의 주인입니까 여름 내 묵혔던 텃밭에 예초기의 날카로운 고음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하면 풀들은 비명도 없이 드러눕습니다. 서너 시간 제초를 하고나면 칼날 주변이 초록의 섬유질로 두툼한 푸른 갑옷을 입지요. 이제는 낫보다 익숙해진 예초기 풍경입니다. 한반도 역사에 있어 수많은 왕조가 거쳐 갔지만 현재까지 살아남은 왕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던 민초라 불리는 백성들만이 여전히 들풀처럼 남아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벤 자는 사라지고, 베인 자는 “저를 벤 낫을 / 향기로 / 감싸”고 여직 살아남은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 ..

다 아는 이야기 / 박노해

다 아는 이야기 박노해 바닷가 마을 백사장을 산책하던 젊은 사업가들이 두런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인데 사람들이 너무 게을러 탈이죠 고깃배 옆에 느긋하게 누워서 담배를 물고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어부들에게 한심하다는 듯 사업가 한 명이 물었다 왜 고기를 안 잡는 거요? "오늘 잡을 만큼은 다 잡았소" 날씨도 좋은데 왜 더 열심히 잡지 않나요? "열심히 더 잡아서 뭘 하게요?" 돈을 벌어야지요, 그래야 모터 달린 배를 사서 더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잖소 그러면 당신은 돈을 모아 큰 배를 두 척, 세 척, 열 척, 선단을 거느리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요 "그런 다음엔 뭘 하죠?" 우리처럼 비행기를 타고 이렇게 멋진 곳을 찾아 인생을 즐기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다고 ..

새집 / 이동재

새집 이동재 새 집에선 소리가 난다 모든 게 낯설어 벽과 벽 벽과 천정 가구와 가구 그리고 바닥이 만나는 부분에서 자기 자리를 잡느라 삐걱거리는 소리 밤새 수인사 하는 소리 새 집에선 냄새가 난다 미처 마르지 않은 나무 그 나무가 살던 숲과 공기 새들과 계곡의 물이끼 산짐승들의 발정 난 냄새와 진달래 철쭉 이름 모를 약초 냄새까지 채석장의 화약 냄새와 골재 트럭이 훑고 간 강바닥의 기름 냄새마저 이합과 집산 고통과 환희 이 모든 것의 접합 부분에선 밤새 소리가 난다 냄새가 난다 조용한 민주주의는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귀촌한 곳에 터를 닦아 비바람 눈보라를 두 번이나 보내고, 한겨울 바람 피할 오두막 하나 세운지 반년이 넘은 우리 집도 “자기 자리를 잡느라 삐걱거리는 소리” 그치지 않습니다. 주변의 ..

쫄딱 / 이상국

쫄딱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경계란 열등감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한 때, 세상이 풍족해지며 다른 한 쪽에서는 야반도주라는 말이 유행처럼 자주 들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한적한 시골 어느 빈집은 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하여 분주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낡은 집에 온기가 돌고, 슬레이트 지붕 위로는..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 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얘기를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었지요. 내 노력 없이 받아..

고마운 일 / 윤 효

고마운 일 윤 효 도로포장공사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한밤중만 골라 하고 있었다. 저소음포장이라 하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자정 넘어 귀가하다 보게 되었다.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차선보다 먼저 횡단보도를 그리고 있었다.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민중은 시대를 읽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굶은 사람에게 음식은 고마운 존재입니다. 억압된 자에게 자유는 지극히 고마운 일이고요. 오랫동안 관이 발주한 각종 공사로 출퇴근 시간에 불편을 겪어온 소시민들에게 야간공사는 꿈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공공의 갑질 관행이 국민과 시민의 일상에 얼마나 많은 불편을 가져다주었습니까. 그것이 마치 특혜이고 자신들의 실적인양 홍보에만 몰두하지 않았던가요. 알고 보면 다 우리들이 십시일반 걷어낸 세금으로 행하는 일..

조금은 알 것 같아 / 장진영

조금은 알 것 같아 장진영 망해본께 알겠더라 쫄딱 망해본께 물맛이고 술맛이고 글맛이고 사람 냄새 조금 더 알겠더라 바닥 냄새가 징하게도 좋더라 겸손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바닥의 맛 사실 바닥이란 건 양파 같아서, 바닥을 들춰내면 또 다른 바닥이 나오고, 또 들춰내면 다른 바닥이 보입니다. 끝까지 파고들면 지구 반대쪽이 나오지 않을까요. 바닥은 결코 바닥이 아닌 어떤 것의 지붕이기도 하지만, 바닥의 맛을 보면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길 희망합니다. 그럼에도 정말 쫄딱 망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다 안다고 하는 사람 말고 “조금” 안다고 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바닥의 맛 말입니다. 지갑의 등짝이 붙어버린 경험도 없이 비운다고 허풍 떠는 사람의 가식적인 언어유희 말고, ..

그까짓 게 뭐라고 / 하재일

그까짓 게 뭐라고 하재일 어느 여고생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하며 남긴 유서에 딱 네 글자가 살아 있었다 “이제 됐어” (아이는 엄마가 제시한 성적을 낸 직후였다) 그까짓 게 뭐라고 그까짓 게 뭐라고 밥이 먼저가 아닌 사람이 먼저인 세상 일각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5.16 군부 쿠테타를 기점으로 융성하던 인문학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 하나 먹고사는 문제만 허락될 뿐 인권을 포함한 삶의 문제 전반에 대한 논의는 불온이라는 딱지로 자리매김 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은 주입식 교육으로 상상력을 억제시켰고 오로지 숫자로 표시 가능한 성적만이 제1의 가치로 자리 잡도록 강요당해 왔습니다. 그런 육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인문학의 절실함이 대두되었고 아직 충분하지는 않..

뒷굽 / 허영만

뒷굽 허영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 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 균형 잡힌 세상이란 나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이 아니다 정치의 계절이 봄보다 먼저 왔습니다. 화사한 벚꽃보다 먼저 와 자리 잡은 선거는 다시 ‘좌빨과 우빨’이라는 이념논쟁으로 확산되고 있고, 하나 더 늘어 ‘중도’라는 색까지 끼어들어 난리법석입니다. 아무리 ‘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