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66

동네 사람 먼 데 사람 / 이 안

동네 사람 먼 데 사람 이 안 뒷산 두릅밭 지나가면서 어린순 몇 개는 살려 두었다 내년 봄이 가까운 동네 사람들 뒷산 두릅밭 지나가면서 우듬지까지 싹둑싹둑 잘라서 갔다 내년 봄이 아득한 먼 데 사람들 ‘그게 어때서’라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참 많은 생각을 하며 삽니다. 그 많은 생각 중에 대부분은 근심과 걱정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요. 다가오지 않을 일을 끌어당겨 평온한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연구 개발을 위한 ‘가정’이나 ‘가설’이 아닌 삶의 많은 시간을 결국 상상으로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의 특징은 배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특정하지 않아도 사람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희망을 실천합니다...

쓸쓸한 위로 / 고 영

쓸쓸한 위로 고 영 사내의 접힌 윗몸을 일으켜 세우자 병상 위에 남아 있던 온기도 따라 일어선다 홑이불 속에 묻어두었던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고통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몸의 친절인가 몸속에서 조금씩 소멸해가는 시간을 자신의 몸으로 확인하는 건 또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수술실로 실려 가는 저 사내에게 가습기가 길고 긴 숨을 대신 몰아쉰다 복도 의자 위 마른 꽃다발 속에서 파리 한 마리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손등에 얹힌 사내의 눈빛이 아직 따뜻하다 젠장, 수술실 앞에선 남겨진 자가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진정한 위로는 신의 영역 아니던가요 더 이상 함께 가지 못하고 헤어질 때 보내야 하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중 더 먹먹해지는 경우는 대게 보내야 하는 남겨진 사람입..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무거움 이면의 희망 아버지라는 존재가 신과 동격일 수는 없지만, 자식에게 아버지는 자식이 원하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로서..

일회용 시대 / 김승희

일회용 시대 김승희 사발면을 후루룩 마시고 일회용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면 일회용 반창고를 딱 떼어서 던져 넣은 것처럼 이 시대에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누구에게서 내가 버림받는다 해도 한번 입고 태워버리는 종이옷처럼, 한번 사용하고 팽개쳐야 하는 콘돔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안에서 눈을 감고 주루룩 쏟아져 내리는 희게 질린 종이컵처럼 껌종이처럼 설탕포장지처럼 그렇게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잠깐 쓰고 버려지는 슬픈 향내의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나는 누구에게 일회용 이상의 가치는 있는지 대한민국은 이미 일회용의 천국이 된지 오래 입니다. 소비문화의 다양화를 넘어 다소비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회용으로..

전철 속의 봄날 /성백원

전철 속의 봄날 성백원 개나리 꽃망울이 실하게 여무는 어느 봄날 비실비실한 눈길은 하염없이 눈길을 헤집는데 눈망울이 똘망한 대여섯 살 사내아이의 심상찮은 눈길을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 “아저씨, 아저씬 뭘 믿고 그렇게 못생겼어요?” 일시에 전철 안으로 함박눈이 쏟아졌고 숨소리가 사라진 허공엔 엄마의 박꽃 같은 얼굴만 낮달보다 더 하얗게 떠 있었다 “고뤠, 너는 참 씩씩하고 멋지게 생겼구나.” 여기저기서 새색시처럼 입을 가린 채 깨드득 거리는 소리만 손가락 사이로 기어 나오고 한숨을 돌린 엄마의 발그레한 볼 사이로 삼월의 봄이 수줍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적 여유가 나를 부끄러움에서 구원해 주었으니 “어느 봄날 오랜 친구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가는 전철을 탔다. 봄기운이 달리는 전철의 창문을 기웃거리는 풍경에 ..

누나가 주고 간 시 / 이 철

누나가 주고 간 시 이 철 112-2119-1212-09 부산은행 이진희 철아 누야다 3만원만 부치도라 미안타 택배 일 하다 늦게 본 문자 시집 내려면 출판사에 300만 원 함진아비 함지고 가듯 발문에 50만 원 못난 시 시집 보내려고 집사람 몰래 3년간 모아온 돈 250만원 해병대 출신 자형 만나 아들 둘 낳고 반여2동 새벽별 아래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한 바퀴 여리고성을 도는 누나 그 누야한테 멀쩡한 돈 5만 원을 보냈다 시가 좀 모여도 돈 없으면 시한테 미안하고 점심값 아껴가며 돈을 좀 모아놓고도 시가 안 써지는 장마철 누나가 시 한 편 주고 갔다 단돈 5만 원에 욕을 해도 즐겁게 받아주는 사람 같은 말,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또는 당시 분위기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릅니다. 어떤 ..

소통 / 이 채

소통 이 채 장작을 패보니 알겠다 나무는 내가 쪼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 여는 것임을 곧게 잘생기고 결이 고운 나무들은 굳이 마당쇠가 내려찍지 않아도 결 따라 순순히 향긋한 가슴을 내어주지만 굵은 옹이를 지니고 천성이 뒤틀어진 놈들은 열 번 찍어도 넘어가지 않는다 소통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순한 결을 내어주는 일이리 혹 누군가 다가와 내 마음 두드릴 때 수많은 옹이들을 낡은 훈장처럼 끌어안고 배배 꼬인 마음결로 그의 도끼자루나 부러뜨리지 않았으면 싶다 결국 소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 벌어지는 많은 오해는 대부분 소통의 부재에서 발생합니다. 전하는 사람도 잘 전해야 하지만 듣는 상대방의 자세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무리 말을 잘 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면 소통은 불가능 하지요. ..

소모품 / 정 숙

소모품 정 숙 마구 깎아 내버렸다 빨리 새것을 쓰고 싶어서 몽땅 연필이 되기 전 버린다고 꾸중을 심히 들었을 때 입술이 삐죽삐죽, 엄마는 구두쇠라며 투덜거렸는데 이제 나이 들어보니 알겠다 깎여나가는 연필이 자신의 모습이란 것을 어쩔 수 없이 사람도 소모품이라는 걸 곧 버려지듯 사라져야 한다는 걸 엄마는 그때 이미 아셨던 거다 인연은 가꾸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 중 ‘영원‘이라는 단어에 해당 되는 것이 있을까요.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많겠지만 그건 단지 바램일 뿐입니다. 인연은 어떤 기회에 우연히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그 인연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비바람이 덮치기도 하고 때론 태풍이 흔들기도 합니다. 하여 오래 쌓아온 ..

마늘종 / 정명순

마늘종 정명순 이슬 촉촉한 아침에 뽑아야 쑤욱 잘 뽑히는 겨 대낮에 한참 독기 올랐는디 그게 뽑히 것냐 왜 안 있냐 사람이랑 똑 같은 겨 오뉴월 땡볕에 오른 독기 건드려 봤자여야 맴이 흥건히 젖어 있을 땐 슬쩍만 건드려도 눈물 터지 듯 앵겨오는 거여 꽃대 뽑히는 것도 서러운디 고분고분 허것냐 젖은 것들끼리 통하는 거여 굳은 마음에서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우리네 어머니는 모두 철학자이거나 시인입니다. 농사를 짓던 장터에서 애호박을 팔던 삶이 녹아들어 있는 한마디 한마디는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치듯 큰 충격을 줍니다. 너른 앞마당에 잡초가 자라면 예초기로 자르기보다 손으로 하나씩 뽑아 뿌리 채 제거하는데 몇 날 며칠 햇살이 쨍쨍 할 때는 뿌리가 잘 딸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가 온 후 또는 이슬이 내린 아침..

길 / 조순희

길 조순희 한 번 밟혔는데 두 번은 못 밟힐까 차곡차곡 쌓인 발자국이 끝내 길이 되었구나 육중한 발바닥의 무게로 짓밟힐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풀아 갈라진 틈 사이로 새살 돋는 잎들아 가던 길, 담담히 가라 끊임없이 자국을 남기다 보면 길이 되는 것 약초를 캐기 위하여 산을 다니다 보면 등산로 아닌 숲속으로 잘 표시나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이기도 하고, 저만이 아는 약초꾼의 길이기도 하고, 더러는 바람의 길이기도 하겠지요. 어떤 길이던 길은 부단한 반복의 결과입니다. 누군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국을 남기다 보면 길이 되는 것이지요. “차곡차곡 쌓인 발자국이 / 끝내 길이 되”는 것입니다. 부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밟혀도 다시 싹을 올리는 잡초의 질긴 삶 또한 자기만의 삶의 길이라고 우..

못 / 정윤천

못 정윤천 너를 위해서 박혀주는 거라고 갖은 폼을 잡다가 아무것도 걸어주지 않자 저 혼자 녹슬어 버리는 대가리들이 있다 ‘배려’라는 말을 자신을 과시하려는 용도로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 흔히들 ‘봉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흔히들 ‘배려’라는 말을 자신을 과시하려는 용도로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들이 그럴싸하지요. 현란한 단어들이 연이어 날아다니고, 지나온 이력들이 화려하게 나열됩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지역사회를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과거를 꺼내들고 현재를 점유합니다. 그러다 결국 “너를 위해서 박혀주는 거라고 갖은 폼을 잡다가 아무것도 걸어주지 않자 저 혼자 녹슬어 버리”고 맙니다. 봉사와 배려는 드러내는 것이..

산산조각 / 정호승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오늘은 내일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깨진다는 건 그것이 그릇이던 관계든 꿈이던 슬픈 일입니다. 다만 어떤 것은 깨져도 잠시 슬프고, 어떤 것은 평생을 두고 끈덕지게 통증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본디 슬픔은 기대와 소망, 다르게는 집착이 근원이 됩니다. 법정스님은 “종이 깨어져서 종소리가 깨어져도 ..

새들에 대한 오해 / 진 란

새들에 대한 오해 진 란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 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세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갈 수 있다 오래 전 ‘새처럼..

손금 / 최재경

손금 최재경 손금을 봐준다고 해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잔금도 없고 굵은 네 줄이 선명하여 좋다더니 다른 건 다 좋은데 오래 살기는 틀렸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술 담배 싹 끊으면 좀 연장이 된단다 내가 어거지로 그의 손금을 본다 당신은 다 좋은데 사람 염장 지르는 소리 그만 해라 했다 술 한 잔 없냐고 하기에 대꾸도 안하고 돌아섰다 눈발이 뿌렸다 그쳤다 지 맘대로 겨울이다 한 잔이 굴뚝같다 고얀히 가슴속에 끄름만 그득하다. 가슴 속의 “끄름”은 스스로 만드는 것 오래 전에 서울 목동에 아주 유명하다는 점쟁이에게 간 적이 있습니다. 사업이 힘들어 보였는지 친구들이 강제로 예약을 했습니다. 순서가 오려면 6개월 정도 걸린다 했는데 3개월 정도 지나서 전화가 왔지요. 마주 앉자 첫..

뒤편 / 천양희

뒤편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일생을 꽃밭으로만 사는 삶은 없습니다 겨울이 되면서 몸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 자주 등이 가려워 팔을 뻗지만 정작 가려운 곳까지는 손이 닿지 않습니다. 뒤는 일정 부분 감당하기 어렵고, 불안하고, 닿기 힘든 부분입니다. 뒤는 앞이라는 전제가 있을 때 반드시 따라오는 한 덩어리의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불편합니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 저 모습 뒤편에는 /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기고 조인 여분의 옷감을 핀으로 고정한 뒷모습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