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11

서포에서

경남 사천시  서포에서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어떤 거만함도, 위세의 발자국도멀리서 달려와 발밑에 부서지는 포말에 눈이 먼 기도문이 된다. 바다의 푸른 팔뚝에 문신처럼 박힌 거룩한 포용을 가슴에 담을 뿐.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서로의 섬이 된다.보지 않으려 해도 볼 수밖에 없는 수평선으로 달려가위태로운 줄타기의 광대가 되는 자신을 떠올리거나수평선의 끝을 잡고 줄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무의식적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고무줄처럼 수평선을 끌어당기고 싶다면아직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좀 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시작 메모>오랜만에 바닷가에 닿았다. 짙은 어둠 속을 더듬거리다 보니 문득 섬에 닿았다. 바다의 낭만 속에 숨은 온갖 생명들의 숨소리와 힘겨운 노동의 거룩함이 밤새 마음..

생물 시 모음

젖소 젖소는 일하지 않는다하루 종일 풀과 사료를 먹으면서아무 생각없이젖을 만든다새벽이면 어김없이고무장갑의 큰 손이우유를 가져가기 위해방문한다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들에게젖소는 반항하지 않고화내지도 않는다젖소는제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결코 젖소는제가 젖소인지 모른다대를 물려가는 혈통은검은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면서서정적인 목장 풍경 속에우리의 뒷골 속에되새김 되는초식동물우리의 뒷모습을 오늘도 보지 못한다 누에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수천 년 동안누에는 그의 속성을바꾸어 본 적이 없다뽕나무는 뽕나무대로누에밥이 되는즐거움의 생활방식을바꾸어 본 적이 없다 한 마리 나방이 되기 위하여수고스럽게 고치를 지어야 하는 노동을생략하지 않는다한숨인 양 뿜어올리는 실오라기를한 줄씩 잡아당겨 명주를 만드는착취의 손에 대..

사랑법 1

사랑법 1 매미가 노래한다라고 썼다가 지운다매미가 운다라고 황급히 썼다가 지운다장마가 지나간 뒤무섭게 돋아오르는 풀들 위로뒤늦제 도착한 바람이머리를 풀어헤치고매미는 잠깐 잠깐 그 사이에소리를 얹는다 나는 당신의 빈 방을 떠올린다흰 건반에 얹히는 손늪의 바닥에 닿으려가시연꽃의 뿌리그 때울음도 아니고 노래도 아닌광시곡이 저 혼자 태어나는 것이다

이별의 시간

이별의 시간이제 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하는데끝내 하지 못했다마지막이라는 말 그러면 영영 너를 잊어버리고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안녕 그 말은 가슴속에 넣었다우리는 서로의 주인이었다우리는 서로를 보듬고 체온을 나누었다그러나 우리는 말을 나누지는 못했다서로의 언어가 달랐으므로오로지 눈빛으로오로지 몸짓으로 나이테를 새겼다기억은 내 옷자락에 묻어있다무심코 신발에 달라붙는 흙처럼옷깃에 떼어내지지 않는 낙엽처럼문득 너는 살아있다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겠다너는 언제나 내게 살아 있으니까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니까

십원짜리

십원짜리길바닥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앞서 가던 사람이 멈칫 무릎을 굽히더니 그냥 지나갔다나도 궁금하여 내려다보니10원짜리 동전 한닢나뭇잎 한 장보다 가벼운동전을 만들기 위해 30원이 든다는데이제는 10원짜리 동전 한 닢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그래서 있어도 없는듯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게로구나에잇 10원짜리 동전 같은 놈아이 말도 그래서 욕이 되는구나 * 계간 다층 2024 가을호

장항역

장항역무궁화호 막차를 타고 장항에 갔네자정이 가깝고 선산은 멀어몇 걸음 앞에 다가온 강물에 눈을 씻었네삐걱거리는 여인숙 문풍지 바람소리밤새도록 나를 울렸네끝내  아버지 고향에 가지 못하고타고 온 기차에 도망치듯 몸을 숨겼네장항역에 내렸네 신성여인숙도 안 보이고 강물도 안보이네장항역은 장항에 없다네그렇지 오십년이 흘렀지# 서천신문 게제 예정

생물을 소재로 한 시 모음

생물을 소재로 한 시 모음젖소  젖소는 일하지 않는다하루 종일 풀과 사료를 먹으면서아무 생각없이젖을 만든다새벽이면 어김없이고무장갑의 큰 손이우유를 가져가기 위해방문한다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들에게젖소는 반항하지 않고화내지도 않는다젖소는제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결코 젖소는제가 젖소인지 모른다대를 물려가는 혈통은검은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면서서정적인 목장 풍경 속에우리의 뒷골 속에되새김 되는초식동물우리의 뒷모습을 오늘도 보지 못한다 누에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수천 년 동안누에는 그의 속성을바꾸어 본 적이 없다뽕나무는 뽕나무대로누에밥이 되는즐거움의 생활방식을바꾸어 본 적이 없다 한 마리 나방이 되기 위하여수고스럽게 고치를 지어야 하는 노동을생략하지 않는다한숨인 양 뿜어올리는 실오라기를한 줄씩 잡아당겨 ..

내구연한 1

내구연한 1 시계가 힘을 쓰지 못하고 멈춰 섰다 어제도 아니고 오늘도 아닌 고개마루턱에 엉거주춤 제 자리를 맴돌다 밥만 축낸 한 생의 내구연한을 알 수가 없어 궁금증을, 머리 속에 가득한 빈 밥그릇같은 폐건전지를 버릴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가위눌린 잠일 뿐인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발걸음이 노여워도 또각또각 심장의 박동을 어떻게 잊을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내구연한 서로를 흘깃 쳐다보며 사라진다 시와 사상 202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