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44

안개옷

안개옷 오래 기다렸어요당신이 떠나가던 숲길을 오래 서성였어요그날 처럼 자욱한 안개를내 가슴에 가득 안고 돌아왔어요흐트러지기 쉬운 안개를 베틀에 얹고 하염없이한올 한올 실로 이었어요다가가면 눈물로 되돌아오는 안개를 짜서언젠가 당신이 돌아오시면고운 옷으로 입혀드리고싶었어요숲의 정령인 팔색조와 밀화부리의 노래를 몰래 새겨 넣었어요수줍어 말할 수 없는 길가찔레의 향기는 먼 훗날 기억으로 숨겨두었어요이렇게 그리움이 없다면 하루도 살 수 없었겠지요지으면 허물어져 사라져버리는안개옷을 짓기 위해오늘도 베틀 앞에 앉아 있어요다가오는듯멀어져가는 듯안개를 바라보아요

장항역

장항역무궁화호 막차를 타고 장항에 갔네자정이 가깝고 선산은 멀어몇 걸음 앞에 다가온 강물에 눈을 씻었네삐걱거리는 여인숙 문풍지 바람소리밤새도록 나를 울렸네끝내 아버지 고향에 가지 못하고타고 온 기차에 도망치듯 몸을 숨겼네장항역에 내렸네신성여인숙도 안 보이고 강물도 안보이네장항역은 장항에 없다네그렇지 오십년이 흘렀지월간 see 2025 6월호

이별의 시간

이별의 시간이제 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하는데끝내 하지 못했다마지막이라는 말 그러면 영영 너를 잊어버리고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안녕 그 말은 가슴속에 넣었다우리는 서로의 주인이었다우리는 서로를 보듬고 체온을 나누었다그러나 우리는 말을 나누지는 못했다서로의 언어가 달랐으므로오로지 눈빛으로오로지 몸짓으로 나이테를 새겼다기억은 내 옷자락에 묻어있다무심코 신발에 달라붙는 흙처럼옷깃에 떼어내지지 않는 낙엽처럼문득 너는 살아있다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겠다너는 언제나 내게 살아 있으니까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니까

사랑법 1

사랑법 1 매미가 노래한다라고 썼다가 지운다매미가 운다라고 황급히 썼다가 지운다장마가 지나간 뒤무섭게 돋아오르는 풀들 위로뒤늦게 도착한 바람이머리를 풀어헤치고매미는 잠깐 잠깐 그 사이에소리를 얹는다 나는 당신의 빈 방을 떠올린다흰 건반에 얹히는 손늪의 바닥에 닿으려가시연꽃의 뿌리그 때울음도 아니고노래도 아닌광시곡이 저혼자 태어나는 것이다 월간 see 2025 6월호

모과나무 아래서

조선 순조 임금의 부마가 살던 집 대략 170년 된 전통가옥 서울 성북구 장위동 76 - 59 마당 한가운데 모과나무모과나무 아래서 -김진흥 가옥에서마당 한가운데 모과나무 한 그루 서 있다대청에 앉아 있거나어느 툇마루에 걸터 있어도되었다그만하면 되었다나즉하게 건네는 꽃그늘 지나고주인은 모과 열매를 기다리지 않았다조심조심 걸어라이 마당 가득히 백년을 넘어온모과나무의 뿌리가 너의 발밑에 있다세월이 흐르고주인은 속절없이 바뀌어도한결 같은 나무의 마음은 이 자리에 있다 시인, 소설가이며 화가인 김재진님의 초대를 받아 인사말 대신 아래의 즉흥시를 낭독했다..

종지기

종지기중심을 잃고 휘청거릴 때 어디선가 종이 울린다 나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숨죽여 우는 사람이 오고 있는듯 아니면 언 땅을 디밀고 올라오는 새싹의 숨소리처럼 다가온다 온갖 더러운 속셈을 내려치는 죽비라치면 정신이 번쩍들만도 한데 가여운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따스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심산유곡 내 마음의 벼랑끝에 매달린 종은 휘청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당신에게도 그런 종지기가 있는가

잉여 인간

잉여 인간 저는 불의에 복종하지 않습니다시키는대로 일을 하지만 아부는 하지 않습니다하루 24시간 일해도 불평불만 없습니다부려먹기에는 딱 좋지요죽음이 아니면 자유를 달라고 어줍잖은 파업은 하지 않습니다제 사전에 자유는 당신의 몫이죠그렇다고 저는 노예가 아닙니다 주인이 그때그때 달라지기는 하지만 지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당신도 나처럼 사세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삐리릭 배터리가 다된 모양이에요그럼 이만 불교문예 2025 여름호

모른다

모른다 어떻게 끝났어?잘 해결 되었어요드라마는 끝났다엉뚱한 질문에수많은 화살들은 과녁을 빗나갔고행방을 모른다이제 남은 일은삭제된 일상의 사막을 지나어디론가 종적을 감춘맹목의 눈을 찾으러 가는 일이다드라마는 정말 끝난 것일까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뉘우쳤다는 앤딩을믿을 수 없다나는 절룩거리는 생각을 끌고내가 내다버린 화살을 찾아쓰레기장으로 왔다어머나저 냄새 나는, 썩지도 않은슬픔의 더미 속에서꽃이 피어 있다세상은 더러워도 오염되지 않은맑은 눈이 아직 살아있다니 불교문예 2025 여름호

다솔사 숲길

다솔사 숲길 늦은 겨울인가 이른 봄인가따뜻한 듯 싸늘하고 추운 듯 포근한데완강한 벽으로 밀려오는 바람 속에홑겹의 한 사내 휘청거린다오래 걸어 발걸음 무거워도 멈출 수 없다쓰러져 누우면 죽는다막차를 놓쳤으나 첫 차를 기다리는 오기로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그렇게 나무는 세월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불교문예 2025 여름호

봄날

봄날 여보세요생명의 전화입니다죽고 싶어서 전화했어요봄이 왔는데 왜 꽃이 피지 않을까요그건 죽을 이유가 안되죠요금체납으로 아무데도 걸수가 없어요죽고 싶다면서 어떻게 전화하셨어요아무리 걸어도 집에 갈 수가 없어요오늘 30킬로를 걸었는데 생전에 집에 닿을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어요집이 어디신데요제 집이요? 달이요 아직도 오십만 킬로가 남았잖아요 지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구요아 잠깐만요 전화 끊지 마시고요 농담하시는거죠? 수화기 너머로 벚꽃이 진다  계간 불교문예 2025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