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24

박서

박서 나는 망치다한번 내리치면 뼛속까지 못이 박힌다고 다들 한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어두운 밤 골목을 바람으로 떠돌 때 조금 유식한 주먹 형님이 내게 말했다 주먹도 고상하게 쓰면 스포츠가 되는거야 비행기도 타고 돈도 벌어 학벌도 필요 없는 박서가 되는거야 아니 박사 말고 영어로 바악서 그래서 나는 바악서가 되었다한 발짝 등 뒤에는 낭떠러지 임전무퇴 몸으로 탱크가 덮쳐와도 눈을 감으면 안되지 성난 황소가 되어 앞으로 앞으로 가벼운 풋 워크로 주먹을 날리면 내 눈에는 낙엽처럼 쓰러지는 그림자만 보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바람을 피하는 재주는 없어 한 방에 보내려다 맷집이 없는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정년도 명퇴도 없이 나는 자루가 없는 망치가 되어버린거야 그래도 가끔은 가위에 눌려 허공과 섀도복싱을 해..

질주

질주 나는 말이다심장에 광활한 초원을 품고 태어났다그러나 나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막사와트랙을 오가는 경주마가 되었다신호가 울리면 눈을 가린 채로 초원을 달리는 환상을 꿈꾸며 트랙을 달렸다나의 주인은 상금을 타서 좋아하고나는 미친 듯이 달릴 수 있어서 좋았다그러나 기계가 아닌 나는뼈가 닳고 근육이 해져서 달리기를 그만두었다승마 초보자들을 태우고 터벅터벅 조심조심걷는 일을 했다관광 마차를 끄는 친구들도 있었는데결국은 안락사를 당하거나도축되어 고기로 팔려나갔다나도 폐차장과 다름없는 곳으로 끌려가굶어 죽었다오래전 내 주인이 지어준 이름나는 질주였다 계간 『시와 시간들』2025 봄호

축시 (혼인) 같이 걸어갑니다

같이 걸어갑니다    - 김태민· 엄한솔님의 화혼에 부쳐    나호열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일입니다 그 먼 길은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며함께 지나가야 할 운명이기도 합니다 사막을 만나고높은 산을 넘어가며늪과 안개로 가득한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은사랑입니다아무리 나눠주어도 모자라지 않는 사랑은믿음입니다 기꺼이 내어주고 채워주며 기뻐하는 마음이사랑이며 믿음입니다 사랑과 믿음이 사는 집은 서로가 등대가 되고 나침판이 되는 곳당신들의 꿈속에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 곧 혼례를 앞둔 신랑 신부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이 된다.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

가만히 다가오는 것들 꽃 피는 순간을 보려다 설핏 잠들었을 때 기척도 없이 내 몸을 감싸는 어둠처럼얼굴에 내려앉는 시간의 발자국처럼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어느날 예고도 없이 떨어져나간 문고리처럼그렇게 슬픔으로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내게 남은 꿈은 꿈꾸지 않는 일이다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당신과 이별하듯가만히 다가오는 것들은 나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 자명종이다 * 시와 사람 2024 겨울호

내구연한 5

내구연한 5 눈 깜짝할 사이여행을 다녀왔다 삼 박 하고 나흘 동안수만 리 만행을 떠난 승려가 된 듯고요히 적막에 면벽한 피정인 듯감금과 해방 사이를 들락거렸다 수인이 되어염려를 가장한 감시와안녕을 빙자한 검사 속에서언제인가 한번을 마주쳐야 할죽음과 만났다 일 년의 내구연한을 선고받은 사람과내일도 모르면서천년을 살듯이 이스트처럼 부푼헛꿈을 꾸는 동안와르르 벚꽃이 지고구름은 한바탕 눈물을 쏟고산을 넘어갔다 분명히 집을 떠나왔는데여전히 나는 아집 속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문학 202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