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칼과 집 1993 77

『칼과 집』(1993)해설: 사회적 존재의 탐색과 휴머니즘의 길

『칼과 집』(1993)해설 사회적 존재의 탐색과 휴머니즘의 길 박윤우 문학평론가∙서울대 강사 詩가 언어를 통한 현실적 재의 발현인 한, 사람이 사는 일로부터 무관한 시쓰기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일을 어떻게 말하는가에 이를 때, 우리는 대상으로서 삶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시쓰기란 진실 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방법론적 도구가 아니라, 진실 자체에 접근하려는 끊임없는 인식과정의 드러냄, 즉 행위화이기 때문이다. 소이 해체의 방법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해체’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현상이 본질을 대신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철저히 종속된 것이며, 그 언어들은 구조 속에 함몰된 인간에 대한 무책임한 발관이자 자의적인 동조에 ..

칼과 집 1993 2021.10.13

눈색이꽃

눈색이꽃 눈색이꽃 물가애 나왔다 겨울 毒이 빠지지 않은 노란 얼굴을 물소리에 비추어 본다 걸음마를 배우는 산골물들은 성급히 어디서 어른이 되는지 때가 묻어가는지 그저 깔깔거리며 몸 굴리며 간다 세상을 등진다는 것이 어디쯤 숨는다는 일일까 시름 낀 거울 닦아낼 때 심신을 더욱 깊게 숨기는 눈색이꽃 얼음을 깨고서 나비떼처럼 묻어 나온다

칼과 집 1993 2021.10.10

壯士의 꿈

壯士의 꿈 샅바를 잔뜩 움켜쥐고 쓰러지거나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부딪치는 힘의. 하염없는 눈물을 본다 모래바닥으로 떨어지는 땀방울 삶의 용트림 뒤로 흘낏 허공이 보였다 사라진다 허리춤을 잡아 당기는 거한의 두툼한 손아귀 날마다 쓰러지고 또 일어서는 지화자 장단 편안하게 누워 승자를 올려다보며 북소리, 꽹과리 소리 펄럭이는 울음을 참으며 한 웅큼 모래로 입을 막는다

칼과 집 1993 2021.10.06

폐차장 노인

폐차장 노인 해머 소리에 한 소절씩 석양이 떨어지고 있다 한 세상을 굴러 온 바퀴들 몸을 버리고 있다 썩어가는 혀 처럼 길어지는 그림자 벌판으로 가서 눕고 조각난 시간의 뼈는 잡초 사이에서 뻘겋게 녹이 슬기 시작한다 일그러지고 망가진 얼굴에서 지나온 길이 언뜻 비친다 조만간 어둠이, 완강했던 철판과 함께 그를 묻어버릴 것이다 해머 소리는 이제 어둠을 두들긴다 힘읋 잃어버린 나사와 못들, 금가지 않은 백미러가 소리 없는 웃음 속에서 적요하게 떨어진다 온갖 사슬을 끊어버리는 붆새의 기쁨을 알고 있는지 염불을 외듯 중얼거림이 툭툭 불거진다 그의 몸속에서 쿨륵대는 해머소리가 들린다

칼과 집 1993 2021.10.02

자폐일기 1

자폐일기 1 말문들을 닫았다 가슴에 빗장을 걸고 그들은 대화를 거부했다 알 수 없는 새들의 수근거림과 난수표같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향기도 기쁨도 없이 마스크를 한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꺾으면 꽃은 꺾이었다 아스팔트에 던지면 피흘리지 않고 말업쇼이 죽어 주었다 독기가 오른 하늘이 푸른 보자기를 우리의 숨통 위에 가만히 덮어 씌웠다

칼과 집 1993 2021.09.27

누에

누에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수천 년 동안 누에는 그의 속성을 바꾸어 본 적이 없다 뽕나무는 뽕나무대로 누에밥이 되는 즐거움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본 적이 없다 한 마리 나방이 되기 위하여 수고스럽게 고치를 지어야 하는 노동을 생략하지 않는다 한숨인 양 뿜어올리는 실오라기를 한 줄씩 잡아당겨 명주를 만드는 착취의 손에 대하여 이빨 한 번 드러내지 않고 집 잃어 징그러운 몸뚱이로 아라저리 비틀며 몰매 때리는 세상 밖으로 길을 만들며 죽어 간다

칼과 집 1993 2021.09.06

드림랜드

드림랜드 회전열차가 돈다 아이를 찾습니다 돌연한 스피커 소리에 산탄총알처럼 새들이 날아가고 여기가 천국이다 아아스크림이 있고 재롱을 떠는 원숭이도 있으니 비단잉어는 자급능력을 상실한 채 화사한 무늬를 못 속에 풀어넣는다 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정답을 알면서도 오답을 적어내며 드림랜드 앞을 지나쳤던 지난 세월 굉음을 내며 또 다시 회전열차가 돈다

칼과 집 1993 2021.09.03

鬪牛

투우鬪牛 그랬었지. 붉은 천 펄럭이는 깃발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던 철 모르던 시절도 있었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불끈 코힘을 내뿜으며 오만과도 같은 뿔을 믿었지 그때는 화려했었어, 흙먼지가 일도록 터져나오는 함성과 박수갈채만 있으면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지 신기루 같았어 온톤 환각제뿐인 붉은 깃발은 사랑이 아니었어 사랑 뒤에 숨은 그림자, 그것은 분노였어 깨달을 새도 없이 사납게 길러진 우리, 풀 대신 피 냄새를 맡으며 자라난 우리 밭갈이나 달구지를 모는 대신 원형경기장에 길들여진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 고슴도치처럼 소심하게 등에 꽂힌 무수한 창칼에도 아픔을 모르는 채 또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늙은 소들

칼과 집 1993 2021.08.30

코뿔소

코뿔소 둥글둥글 살아가려면 적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다가도 생존은 싸늘한 경쟁이라고 엄포도 놓으시던 어머님의 옳고도 지당하신 말씀 고루고루 새기다가 어느새 길 잃어 어른이 되었다 좌충우돌 그놈의 뿔 때문에 피헤서 가도 눈물이 나고 피하지 못하여 피 터지는 삿대질은 허공에 스러진다 이 가슴에 얹힌 묵직한 것 성냥불을 그어대도 불붙지 않는 나의 피 채찍을 휘둘러도 꿈적을 않는 고집불통 코뿔소다 힘 자랑하는 코뿔소들 쏟아지는 상처를 감싸쥐고 늪지대인 서울에 서식한다 코뿔소들이 몰래 버리는 이 냄새나는 누가 코뿔소의 눈물을 보았느냐

칼과 집 1993 2021.08.25

눈사람

눈사람 1. 아그리파를 그리는 소녀의 손끝에서 내리는 눈 빛과 그림자를 한 번 두번 세 번 덧칠을 하며 4B 연필의 심지 속에서 태어나는 눈 스스로 완성되지 않으며 온전히 그윽한 심연만을 보여주는 눈 2. 창 박에 내리는 눈이 마음속까지 소복이 내려서 걷지 않아도 가닿는 그 집 앞 봄날이 올 때까지 서 있는 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 날까지 오래 기다리며 사는 일 3 애들아, 그건 천사의 날개가 아니란다 밤마다 몰래 버린 치욕과 불순한 공기들이 위장을 하고 다가오는 그건 악마란다 눈병을 일으키는 강산성 눈, 뼈를 녹이고 탈모증을 유발하는 불행은 눈처럼 다가오는 것이란다 4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흰 것만을 숭상해 왔다 아,너무나 희어 속이 보이지 않는 더럽혀질 수 밖에 없는 그대 대 문 앞에 서성거리는 눈..

칼과 집 1993 2021.08.19

자연의 법칙

자연의 법칙 이른 아침 숲 속에 고개 숙인 사람들 있다 신전에 엎드린 순례자처럼 떡갈나무 아래에 눈동자가 이슬을 머금는다 조용하다 저만큼 다람쥐가 숨 죽여 그들을 바라본다 제 먹을 만큼의 열매를 떨구어 놓은 다람쥐들은 무섭다 죄책감도 없이 착취해 가는 저 부드러운 손길들 한 사발의 토토리묵이 식탁에 올려지고 머나 먼 아프리카에선 굶주린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쌉쌀한 도토리묵 맛 속에 굶어 죽은 다람쥐 일가의 비명이 가득한 줄 모르고 .....,

칼과 집 1993 2021.08.10

자폐일기 2

자폐일기 2 체납공과금 통지서처럼 봄은 온다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만세소리 들리고 유관순 누나도 함께 온다 벗어라 낮은 물소리 귓가를 스치며 더욱 허리 굽혀 돌아나간 후 지난 겨울은 쓸쓸하였다 편지 한 통 오지 않았으므로 독백이 가득 찰 때까지 꽃은 피지 않을 작정이었다 빚처럼 목숨은 무거웠다 바다에 내리는 마리화나 마주치기 싫은 사람처럼 봄은 온다 벽으로 조금씩 다가서 온다 끓지 않는 피, 이 봄에 바꿔 입어야 할 옷이 없다

칼과 집 1993 2021.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