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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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12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아정체성 탐색

해설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아정체성 탐색 - 배석봉의 소설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1. 글 머리에 배석봉은 1958년 대구 출생이고, 원적은 동해를 밝히는 섬 울릉도다. 대구에서 중학교 1년을 마치고 상경하여 이대부고와 건국대를 다녔다. 일찍이 문필에 경도되어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반 활동을 했고, 대학에서는 학보사 기자로 일하며 습작을 했다. 재학 중이던 1979년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에 당선하고,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건국대에 적을 두고 학보사 주간을 맡고 있던 이동하 소설가, 국문과 교수로 있던 조남현 평론가, 그리고 정창범 평론가로부터 가까이 지도를 받았다. 건국대 문단의 김홍신, 김건일, 나호열, 오만환 등의 문인, 김한길 소설가 등과 문학..

바다의 혼

바다의 혼 이젠 모두 다 떠난 것이라고, 김이 탄 버스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사내는 느꼈다. 순간 밑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분노와 이제는 완전히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걸었다. 좁은 대천 읍내가 낯설고 생소하게 다가왔다. 터미널을 벗어나 거리의 맨 끝을 찾았을 쯤엔 분노는 소리 없이 밀려오는 슬픔으로 변하고 있었다. 염병할, 너무나 사치스러운 인간의 부류로 빠져들고 있는 자신에 대해 사내는 수없이 염병을 먹이고 싶어졌다. 서서히 차오른 분노와 슬픔이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점점 추루해지고 있는 것을 사내는 알고 있다. 이런 식의 위험한 허물벗기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가장 무서운 멍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는 비난의 화살과 그 자신의 내..

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창백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등 아래에서 마취사들은 키득거리고 있다. 굵은 올의 푸른 색 제복은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 심연의 깊은 늪으로 의식이 빠져 들고 있다. 입안을 맴돌던 끈적끈적했던 피마자기름은 욱한 기분을 만들어 낸다. 이미 자유를 잃고 버려져 있는 왼팔로 링거액이 파고들고 있다. 죽음에 이력이 나 버린 마취사는 흥미롭다는 듯이 지껄여 댄다. “마 여기선 내가 왕이여, 너 퇴원하면 나 찾아 올 거야 안 올 거야” “글쎄요, 제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찾아오죠.” “마, 그건 우리 손에 달렸다니까. 오징어 사다 주면 살려주지.” 결국 죽는다는 것이 오징어 한 마리만큼의 가치조차 없다. 마취사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징어이니까 말이야.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을 ..

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창백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등 아래에서 마취사들은 키득거리고 있다. 굵은 올의 푸른 색 제복은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 심연의 깊은 늪으로 의식이 빠져 들고 있다. 입안을 맴돌던 끈적끈적했던 피마자기름은 욱한 기분을 만들어 낸다. 이미 자유를 잃고 버려져 있는 왼팔로 링거액이 파고들고 있다. 죽음에 이력이 나 버린 마취사는 흥미롭다는 듯이 지껄여 댄다. “마 여기선 내가 왕이여, 너 퇴원하면 나 찾아 올 거야 안 올 거야” “글쎄요, 제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찾아오죠.” “마, 그건 우리 손에 달렸다니까. 오징어 사다 주면 살려주지.” 결국 죽는다는 것이 오징어 한 마리만큼의 가치조차 없다. 마취사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징어이니까 말이야.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을 ..

아직 가지 않은 길

아직 가지 않은 길 단단히 작정을 하고 세윤이 인옥을 만났지만, 시린 차가운 겨울 강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런 한강다리 위에서 둘은 아무런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촌의 불빛과 모래를 파내고 있는 준설선의 검은 동체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으로 서 있다. 네 번째 교각 위에서 느끼는 세윤의 감정은, 부조화 그림 속에 잘못 등장한 어릿광대가 앞선 차에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운전자의 경적에 맞춰 지어야하는 의미없는 몸짓처럼 허황하다. “바람이 상당히 차군요.” 네. 바람이 상당히 차요. 너무 추워 지금 세윤씨가 지키고 있는 그런 침묵마냥,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아요. 왜 내게 이런 숨 막히는 고통을 주세요. 청춘 남녀가 이런 썰렁한 다리 위에서 만나야만 할 이유가 뭐죠. 날이 춥다고 말을 잃어..

버려진 혹은 잊혀진

버려진 혹은 잊혀진 잠시 뜸하던 바람이 세어지자, 움막의 한구석에서 사내 몰래 은밀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새의 날갯짓이 다시 시작되었다. 푸드드드...ㄱ 푸드드드...ㄱ 새의 날갯짓 소리에 사내는 칼을 갈던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어둠의 한 구석, 새의 날갯짓이 다시 시작된 곳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사내는 이제는 이 승부의 마지막 장을 시작해도 좋을 때라 느꼈다. 일주일. 사내는 지난 일주일을 새와 함께 스스로 이 움막에 갇혔다. 동면에 드는 뱀이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를 구멍에 마지막 흙을 덮듯이, 사내는 문에 못질을 했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내내 칼만 갈았다. 사내는, 자신이 정한 마지막 승부를 위해, 더 뾰쪽하고 날카롭게 칼의 날을 세우며, 날이 서가는 만큼씩의 증오도 함께 벼..

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등 뒤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고는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녀의 그런 손짓 뒤에서 이미 막 시작된 초겨울의 추위가 묻어나는 것을 느꼈다. 급하게 길을 나선 그녀는 좀 피곤하지만 약해진 모습으로 어머님 상가에서 도착할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것처럼, 갑작스런 어머님의 죽음과 예정에 없는 추위가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 것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서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몇몇의 전송객만이 걸음을 재촉하며 승강장을 떠났다.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도 돌아섰다. 지금 나의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은 그녀 어머님의 부고를 통보받고도 미적대는 나를 그냥 두고 그녀 혼자 내려갔기 때문이다. 혼자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뿐..

신기루

신기루 남편이 그사이 집을 나갔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두어 달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없었다. 대신 행랑채에는 이른 7월의 낯설은 피서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 수영팬티에 흰 티셔츠를 입고 평상에 앉아 있던 사내는, 나의 출현에 약간은 흥미로운 눈짓을 지었다. 그런 사내의 등 뒤로 저녁 햇살이 붉게 저물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그런 표정은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내가 섬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옷가지나 화장대 위의 화장품은 잠시 마실을 다녀온 주인을 반기는 모습 그대로 놓여있었다. 내가 잠시 집을 떠난 것만 빼면,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방안에서 나는 남편의 부재를 생각했다. 어쩌면 남편은 지금까지..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잠시 방을 비추던 햇살은 이내 사라졌다. 사내는 천호동 쪽으로 앉아 여전히 뭔가를 빚고 있었다. 새벽에 심한 갈증으로 깼을 때도 그렇게 앉아 있었으니 서너 시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밤을 새며 그 짓을 해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내는 곧잘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실눈을 뜨고 방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묵은 때로 절은 옷가지와 함께 며칠째 윗목으로 밀려나있는 냄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냄비에 눌어붙은 잔반에서 나는 쉰내와 습기를 잔뜩 먹은 좁은 골방이 내뿜는 눅눅하고 매캐한 내음이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죽음의 냄새가 있다면 지금 내가 맡고 있는 냄새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운신을 못하고 자리를 깔고 누워 누군가에 의해 몸이 거둬질 때를 기다..

공범 연습

공범 연습 음산한 겨울바람은 마른하늘에서 윙윙 거리고 있다. 멋없이 휑하니 서 있는 전신주 줄들도 소리 내어 울어댄다. 털외투 깊숙이 목을 움츠린 사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제 겨울은 더 이상의 새로운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울지 않는 사내들만이 역한 냄새를 피우며 가물거리는 포장마차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젊은 연인들은 겨울밤을 사랑한다. 숨은 연정이 두 눈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남자의 소유욕이나 여자의 의지 욕이 아닌 둘만이 아는 밀실을 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음산한 겨울밤에는 고독한 사내들끼리 술을 마신다. “노형. 임어당이 쓴 주도에 관한 글을 읽어 보셨소?” “……” 옆에 앉은 사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가운데 사나이..

내게 소설은 무엇일까?

내게 소설은 무엇일까? 표제작인 ‘공범연습’이 건대학보에 실려 문자화된 것이 1977년 말이고 직장인 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으로 등단하여 이름 앞에 ‘소설가’란 호칭을 붙일 수 있게 된 것이 2018년 3월이니,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면 그 시간의 벌어짐이 40년이 조금 넘는다. 그 지나온 사십몇년의 시간. 소설과는 무관하게 보낸 것처럼 보이는 그 긴 시간이, 스무살에 열심히 소설을 쓰고자 했던 내게는 의미없이 흘러간 빈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앞날을 위한 연륜의 폭을 다졌던 시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영상시대를 대변하는 틱톡이나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합종연횡의 라이프 스토리가 난무하는 지금, 독자들이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소설책을 내기로 한 것은, 그것도 대학생 때..

배석봉 소설집 : 《공범연습》

판권 공범연습 1쇄 발행일│2022년 1월 10일 지은이│배석봉 펴낸이│정화숙 펴낸곳│개미 출판등록│제313­2001­61호 1992. 2. 18 주소│(04175)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12, B-103호(마포동, 한신빌딩) 전화│(02)704­2546 팩스│(02)714­2365 E-mail│lily12140@hanmail.net ⓒ배석봉, 2022 ISBN 979­11­90168­34­2 03810 값 15,000원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무단 전재 및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차례 소설가의 말 ______ 005 공범연습 ______ 011 떠나는 자와 남는 자 ______ 033 신기루 ______ 061 뫼비우스의 띠 ______ 087 버려진 혹은 잊혀진 ______ 109 아직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