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촉도 2015 77

시의 빗자루를 들고 경계에 서 있는 시인 / 정 유 화

시의 빗자루를 들고 경계에 서 있는 시인 정 유 화 (시인·서울시립대 강의전담교수) 1. 경계 공간에서 나오는 시적 반향과 울림 익히 알고 있듯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내에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에 의하면, 인간 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에 의해서 그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미는 하나의 굳어진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세계, 곧 현실적인 환경과 공간에 따라 그 의미는 유동적으로 변화되는 특징을 지닌다. 그렇다면 그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세상에 대하여 가장 예민한 촉수를 드러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시인들이다. 시인들은 ..

촉도 2015 2020.12.28

선물

선물 배운 것 없고 아는 것 없어 바다에 절하며 살았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바다는 아무 말 없이 미역도 내어주고 파래도 톳도 던져 주었다 오래전 서방님을 삼켜 버린 바다 수평선에 걸어 놓은 그리움마냥 마르고 딱딱해진 선물은 누가 준 것인가 머리를 짓누르는 생계를 이고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니 육십 년이 돌았네 얼굴에 깊이 파인 이 주름살이 그 흔적이야 절룩이는 발자국이야 오늘도 바다에 절을 하며 손에 미역 몇 줄기 받아 든 부르는 사람 없어 이름 오래전 잊어버린 할머니 세월에 빛바랜 꽃잎 같은 웃음이어도 얼굴에 환하기로 으뜸이다 어둡고 험한 밤길을 걷다가 문득 내 가슴에서 피어나는 그 꽃

촉도 2015 2020.12.22

틀니

틀니 어제는 교회에 갔고 오늘은 법당에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하루치의 까닭 모를 분노가 잡초처럼 돋아 오르고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고요히 앉아 지난 신문을 거꾸로 들어 읽으시는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병 일 년 열두 달 눈 내리는 나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되돌아오는 길이 지워져버려 그분의 얼굴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이곳이 지옥이었다가 극락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분은 경극의 주인공이십니다 입 벌리세요 호랑이는 굶어서 죽지 잡아먹히지는 않겠는지요 틀니를 뽑아 물에 헹굴 때 그분은 순하디순한 얼굴로 웃고 계십니다 아니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나의 교회와 나의 법당 어머니를 벗어날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리석은 양 길 잃은 양..

촉도 2015 2020.12.18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은 불편하다 국보 78호 반가사유 부처님이나 국보 83호 반가사유 부처님도 불편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휜 저 불온한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일만큼 사람의 생각은 불편하다 한쪽 무릎을 구부린 채 구름 같은 머리를 팔로 받친 채 각을 세워 보라 아무래도 생각하기 위해서 턱을 고이고 다리를 구부 렸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고통 없이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반가사유가 그러하듯 저 자세는 먼저 고통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반드시 거쳐야 할 의식인지도 모른다 고통을 생각하는 나날이 지나야 고통의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이 박여야 생각은 맑아 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각은 생각을 먹고 자란다 생각이 사라져야 찾아오는 안락은 없다 평화만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평화라는 단어가 없다 전쟁을..

촉도 2015 2020.12.15

공하고 놀다

공하고 놀다 상상 임신 끝에 알을 낳았다 무정란의 공 부화되지 못한 채 주렁주렁 망태기에 담겨 있다가 태생의 탱탱함으로 이리저리 차이다가 별이 될 듯 하늘로 솟구치다가 울타리를 넘어 차에 치여 사정없이 찌그러진다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공 끝내 가죽만 남아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는 평생을 걸고 이 공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이 공의 주인은 누구인가!

촉도 2015 2020.12.09

껌 씹어 주세요 내 몸의 향기와 달콤함이 사라질 때까지 이빨로 자근자근 애무해 주세요 버릴 땐 안녕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애꿎게 재회를 약속하는 것은 쿨하지 않아요 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전생에 나무였다고 말하면 믿으시겠어요 나무의 눈물이 고무라 하면 웃으시겠어요 이 질기고 탄력 있는 몸매는 어쩔 수 없이 숨기지 못하겠네요 이 열등감이 집착이 되네요 이제 이 열등의 이빨로 어디든 붙어 드릴께요 당신이 나를 버리는 그 순간 껌은 이렇게 해석된다. 잘 안 풀린, 어려운, 잊혀진, 조건이 좋지 않은, 돈을 잘 벌 것 같지 않은 마이너리티

촉도 2015 2020.12.02

스카이 댄서

스카이 댄서 풍경은 서 있다 흔들흔들 벽을 뚫고 고개를 넣어도 풍경은 고무줄처럼 늘어날 뿐 쓰러지지도 모로 기울지도 않는다 나무가 뿌리로 날갯짓하며 하늘을 날아가는 듯 시한부 벽보의 웅크린 글씨로 응축되어 있는 출발선에 선 단거리 선수들의 가쁜 숨 등을 보이며 열 걸음 걸어가는 카우보이는 열 걸음을 걸은 후에도 몸을 돌리지 않는다 어디서 총알이 치명적인 사랑을 겨누었으나 탕! 풍경이 잠시 기우뚱하다가 오뚝이처럼 일어선다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 어쩐지 내세 같은, 무너진 폐허 같은 앞뒤가 없는 풍경을 무한히 뒤집어 보는 저 사내 행인들을 향해 쓰레기 줍듯 연신 허리를 굽히고 있다 세월이 하염없이 가엾다는 듯

촉도 2015 2020.11.24

번개의 초상

번개의 초상 두꺼운 구름 사전의 갈피 사이에서 태어나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찰나의 꽃송이 갈기갈기 부서져내려도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겠다는 듯이 지금 열린 빗장을 넘어 달린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동토와 사막 그 사이 어디엔가 멈춰서면 다시 하나가 되는 말 그러나 그 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 똬리를 튼 채 긴 잠에 빠져 있는 겨울 강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아직 물로 환생하지 못한 불이 없는 날개를 퍼덕이는 문장이 보인다

촉도 2015 2020.11.18

구름의 집

구름의 집 한때 집이었고 기둥이었던 폐기물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둔탁한 광물의 알 속에서 밤새 얼룩진 기도를 마친 순례자처럼 붉은 눈물의 태양을 향해 솟아오른다 누구는 스모그라 하고 누구는 먼지라고 호명하는 새들의 뒤를 몇 점 구름이 수호자가 되어 뒤따르고 있다 버려진 폐기물들은 다시 한 번 더 버려진다 구름의 집이라는 낭만의 집 그러나 구름은 집이 없다 몸통은 없고 날개만 퍼덕이는 하루살이처럼

촉도 2015 2020.11.12

담쟁이의 꿈

담쟁이의 꿈 눈을 떠도 눈앞이 캄캄한 사람들은 알지 허공에 손을 내민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꼿꼿이 서는 나무의 꿈이 사라지고 그리하여 한 뼘이라도 더, 해의 피를 따스하게 꿈꿀 수 있는 심장에 가닿고 싶은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 허공에 손들이 허우적거린다 나는 새가 되고 싶지 않아 날고 싶지 ?아 그러나 어디든 끈질긴 희망의 몸에 날개가 되어 주고 싶어 저 벽의 날개 너와 나를 가르는 저 벽의 날개 견고한 모든 슬픔이 새가 되어 날아갈 그날까지 나는 푸르게 푸르게 날개를 키울 거야 눈을 떠도 눈앞이 캄캄한 사람들의 손이 허공에 핏줄을 새긴다 깃발처럼 펄럭인다

촉도 2015 2020.11.05

이사

이사 강남 이 편한 세상에 그가 왔다 검은 제복 젊은 경비원이 수상한 출입자를 감시하는 정문을 지나 대리석 깔린 안마당에 좌정했다 몸이 반쪽으로 쪼개져도 죽지 않고 용케 당진 어느 마을 송두리째 뭉그러져 사라져도 용케 살아남았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주고 비바람 막아 주며 죽은 듯 삼백 년 벼락 맞고도 살아 있더니 이 편한 세상에 한 그루 정원수로 팔려 왔다 푸르기는 하나 완강한 철책에 둘러싸여 손길 닿지 않는 그만큼의 거리 저 불편한 세상과 이 편한 세상 사이에서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침묵의 우두커니 새 한 마리 깃들지 않은 이곳 집과 무덤 사이의 어디쯤이다

촉도 2015 2020.10.29

보자기의 꿈

보자기의 꿈 뼈대가 없으니 줏대도 따라서 없다고 눈길 닿지 않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보자기들이 꿈을 꾼다 부끄러운 물건을 가려 주고 음식을 덮어 주고 소중한 예물을 바치는 공손한 손 명품 가방이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그 마음이 이리저리 접힌 채 복福을 꿈꾼다 깃발이 되지 못해도 만장이 되지 못해도 바람에 휘날릴 수는 있다는 듯 나일론 인생들이 숨죽이며 가슴을 열고 있다

촉도 2015 2020.10.25

수청리 그 나무

수청리 그 나무 잎 내고 팔 뻗치는 일이 나무의 말씀인 줄 알았다 푸르러지고 곧아지는 것이 나무의 말씀인 줄 알았다 일렁이는 꽃물결과 열매들이 나무의 말씀인 줄 알았다 아, 그러나 가을이 가아을 하고 긴 숨 토해 내며 오기 전까지 아니, 잎 지고 꽃 지고 열매 떨어지기까지 나무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저 강물처럼 맨몸으로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나무는 쓸쓸 쓸쓸 한마디 말씀을 나눠 주었다

촉도 2015 2020.10.21

염막鹽幕을 지나며

염막鹽幕을 지나며 수평선 너머 난바다가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온 날부 터 행복한 천형天刑은 시작되었다 푸르고 울렁거리는 그 말 바다의 살을 발라내는 한여름이 지나고 저녁노을 그 불길의 그림자를 허물어져 가는 창고 쪽으로 늘어뜨리자 그제야 바다는 남김없이 제 몸을 화염에 던져주었다 사리로 남은 흰 꽃 발이 없어도 천 리를 가고 생의 행간에 슬며시 발자국을 남기는 법 염막 같은 한 사내가 수없이 되뇐 빛나는 눈물 속에는 독과 약이 함께 부화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촉도 2015 2020.10.17

슬픔도 오래되면 울울해진다

슬픔도 오래되면 울울해진다 견디지 못할 슬픔도 있고 삭지 않은 슬픔도 있지만 슬픔도 오래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 이 모든 상형의 못난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 600년의 고독을 아직도 푸르게 뻗고 있다

촉도 2015 2020.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