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신춘문예 당선시 13

2024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4 경인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달로 가는 나무김문자​달의 범람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땅은다섯 개의 줄기로 자라는 은행나무의 품이 되었다보름달 상현달 하현달 초승달 그믐달을 키우는인천 장수동 사적 562*번 800년 된 은행나무처음부터 약성이 쓴 뿌리에서 시작되었다오래된 나무는 달에서 왔다달이 몸을 바꿀 때마다 은행나무의 수화는 빠르다전하지 못한 말들은 툭 떨어지거나 노랗게 익어갔다은행나무는 자라면서 달의 말을 하고은행나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바닷물이 해안까지 차오르는 슈퍼 문일 때남자는 눈을 감고 여자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한다오래된 나무의 우듬지는 800년 동안 달로 가고 있다소래산 성주산 관모산 거마산을 거느린 장수동 은행나무달빛이 은행나무 꼭짓점을 더듬는 농도 짙은 포즈은행나무는 ..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시운전​      강지수​날 때부터 앞니를 두 개 달고 태어난 아이치고 천성이 소심하다 했습니다가장 부끄러운 기억이 뭐예요?종합병원 의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발가벗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요그게 기억나요?최초의 관심과 수치의 흔적이 앞니에 누렇게 기록되었지요 나와 함께 태어난 앞니들은 백일을 버티지 못하고 삭은 바람에 뽑혀야 했지만, 어쩐지 그놈들의 신경은 잇몸 아래에 잠재해 있다가 언제고 튀어 올라 너 나를 뽑았지, 우리 때문에 너는 신문에도 났는데, 하고 윽박을 지를 것 같더란 말입니다횡단보도를 건너다 대大자로 뻗었을 때 혹은 동명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그럴 때에는 앞니를 떠올려보곤 하는 겁니다 천성이란 무엇인지, 왜 어떤 흔적은 흉터로서 역할하지 못하고 삭아져버..

2024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2024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웰빙 / 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

2024 광주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랑 ​ 엄지인 ​ ​ 잔디를 깎습니다 마당은 풀 냄새로 비릿합니다 잔디가 흘린 피와 눈물이라는 생각 우린 서로 피의 색깔이 달라 참 다행이지 혈통이 아주 먼 사이라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린 끝을 만져보는데 아프지 않습니다 심장과는 아주 먼 거리일까요 손 뼘으로 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머리에서 심장까지 전력을 다해 뜁니다 머리카락 입장에선 불행일지 모른다는 생각 골목 밖에선 길냥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습니다 고양이는 사람에게만 소리 내 운다고 하는데 축축한 여기 그냥 좀 내버려두라고 배가 헐렁한 동물에게 보내는 우호적인 경고라는 생각 다치지 않게 손톱 칼로 조심히 군살을 깎지만 소스라칩니다 가장자리에서 바깥으로 밀리지 않으려는 비명 TV에서는 기상 캐스터의 주의보가 쾌속으로 지나갑니다 암거북들이 짝을 잃고..

[2024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

[2024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시] ​ 솟아오른 지하 ​ 황주현 ​ ​몇 겹 속에 갇히면 /그곳이 지하가 된다 ​4시 25분의 지상이 감쪽같이 4시 26분의 지하에 세상의 빛을 넘겨주는 일, 언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지상의 지하화가 도모되었을까 땅을 판 적도 없는데 다급한 말소리들은 지표면 위쪽에들 있다 조금 전의 당신의 양손과 두 볼이, 주름의 표정과 웃음이, 켜켜이 쌓인 말들이 들춰지고 있다 기억과 어둠이 뒤섞인 지상은 점점 잠의 늪으로 빠져드는데 누구도 이 어둠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다 ​몸이 몸을 옥죄고 있다 칠 층이 무너지고 십오 층이 무너졌다 그 사이 부서진 시멘트는 더 단단해지고 켜켜이 쌓인 흙은 견고하게 다져졌다 빠져나가지 못한 시간이 꽁꽁 얼어붙..

[202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4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해변에서 ​ 박유빈 ​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리병도 아니었고 피서객이 흘리고 간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것은 오점 없이 깨끗한 눈알 ​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화창하지 않다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

부산일보 [2024 신춘문예-시]

[2024 신춘문예-시] 펜치가 필요한 시점 / 김해인 가 입력 : 2024-01-01 16:54:44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짜장면과 짬봉 앞에서 고민하는 나를 절단해 줘요 불가마에 단련된 최초의 연장이 되느냐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오는 레디메이드 툴이 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선택 후의 방향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요 차라리 한 끼 굶을 일을 어느 시궁창에 빠질지 모를 일입니다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이 친척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를 꾹 눌러서 이쪽저쪽으로 갈라줘요 이쪽으로 가면 강의 상류 끝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만나고 싶죠 저쪽으로 가면 바다의 시작, 흰 치마를 펼쳐서라도 항해하는 게 로망인 걸요 밸런스게임은 사양할게요 이쪽으로 가면 파란 대문이 열려 있고 저쪽으로 가면 녹슨 대문..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길을 짜다 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 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이실비 서울늑대 / 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take /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 ..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여기 있다 / 명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왼편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은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자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2024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_ 벽 / 추성은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르는 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뼈를 던지는 것처럼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에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들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