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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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4

[24] 가볍고도 무겁고 기다려지다가도 지긋지긋한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4] 가볍고도 무겁고 기다려지다가도 지긋지긋한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11.27. 23:58업데이트 2024.11.28. 04:57  첫눈 내리네수선화 잎사귀가휘어질 만큼初雪(はつゆき)や水仙(すいせん)のはのたわむまで 밤새 내릴 모양이다. 첫눈 예보가 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조금 내리다 그치겠지. 자정 무렵, 하늘에서 희끗희끗 보드랍고 촉촉한 것이 한 잎 두 잎 날리기에 탄성을 질렀다. 와, 첫눈이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처럼 반갑다. 지금 자는 사람들은 아마 못 볼 거야. 곧 녹을 테니까. 첫눈은 그런 거니까. 아무도 모르게 잠깐 내리다가 그치는 거니까. 지금 절기는 소설(小雪)이 아닌가. 눈이 작게 조금만 내리는 때다.어라,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네. 새벽..

[23] 과메기와 정어리에 기대어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3] 과메기와 정어리에 기대어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11.13. 23:59업데이트 2024.11.14. 00:11   소슬바람아말린 정어리 등에바다의 빛깔木(こ)がらしや目刺(めざ)しにのこる海(うみ)のいろ 어제는 문득 과메기가 먹고 싶었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으스스한 늦가을 바람이 등골에 스밀 무렵 생각나는 계절 음식이다. 꽁치를 바닷바람에 꾸덕꾸덕하게 말려서 한입 크기로 썰어 깻잎, 봄동, 쪽파, 청양고추, 마늘 등과 함께 쌈장에 싸 먹는다. 김이나 미역으로 싸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갈색으로 윤기가 반드르르하게 도는 과메기는 차고 깨끗한 바람에 잘 말라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각종 채소와 해조류 사이로 쫀득쫀득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생선 살..

[22] 당신의 용은 안녕하십니까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2] 당신의 용은 안녕하십니까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10.30. 23:50   찬 이슬이여구멍에는 분명히용이 들었다つゆさむ あな りゅう露寒や穴にはきっと龍がいる 찬 바람이 부니 뱀의 구멍이 열리는 계절이 왔다. 입동이 다가오면 개구리나 뱀처럼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변온동물은 살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 준비를 한다. 나는 숲길을 걷다가 흙바닥에 뚫린 주먹만 하게 동그란 구멍을 발견할 때마다 그 안으로 기다란 몸을 구불구불 집어넣었을 뱀의 차고 미끄러운 피부를 상상한다. 긴 시간 잠을 자야 하니 맛있는 걸 많이 먹고 통통하게 살이 올랐을까. 구멍의 크기로 뱀의 허리둘레를 가늠해 본다. 꽤 큰 녀석이다. 먹이를 구하러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녀석과 마주쳤..

[21] 시의 나라에 어서 오세요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1] 시의 나라에 어서 오세요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10.16. 23:50업데이트 2024.10.17. 02:56 그가 한마디내가 한마디 가을깊어 가누나かれいちごわれいちごあきふか彼一語我一語秋深みかも예를 들면, 호젓한 가을 산 정자 같은 곳에서.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가까운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한마디, 내가 한마디. 많은 말은 필요 없다. 속도가 빠를 이유도 없다. 그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천천히, 천천히. 어디선가 한 줄기 가을바람이 불어와, 낙엽 향이 진하게 밴 흙냄새가 어깨를 타고 올라오면, 이윽고 그와 나는 그윽이 깊어 가는 가을, 그 속에서 하나의 풍경이 된다. 다람쥐와 도토리와 노랗게 익은 모과와 함께. 사람 ..

[20] 가을밤에 떠오르는 것들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0] 가을밤에 떠오르는 것들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9.26. 00:02  첫사랑이여등롱에 다가가는얼굴과 얼굴初(はつ)恋(こい)や燈(とう)籠(ろう)によする顔(かお)と顔(かお)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마음이 잘 익은 단감처럼 몰랑몰랑해지는 계절이다. 문득 목덜미로 훅 불어 드는 찬 바람에도 그리움에 사무치고, 어두운 수풀 뒤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잊었던 추억들이 떠오르며, 가로등 불빛 아래 느릿느릿 걷는 고양이의 뒤태가 사랑스러워 달려가 껴안아 주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유독 지난여름의 아스팔트가 잘 달구어진 뚝배기처럼 극심하게 뜨거웠기 때문일까. 잔혹한 더위를 다 같이 이겨낸 인간, 벌레, 개, 고양이, 새가 모두 동지처럼 애틋하다. 오래..

[19] 달 한 모금 마시고 소원을 빌고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9] 달 한 모금 마시고 소원을 빌고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9.11. 23:50업데이트 2024.09.12. 00:18  달맞이하다다다미에 쏟았네꽃병 속의 물つきみ たたみ はな みずお月見や畳にこぼす花の水달이 차오르니 바야흐로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다. 어린 날에는 추석날 밤 할머니 손을 잡고 신기하도록 크고 선명하여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자, 어서 소원을 빌어야지. 한가위 달님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신다”라고 하시면서 달이 구름 뒤로 사라질세라 당신도 소원을 비셨다.“달님, 올해도 우리 아이들이 그저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할머니는 진지했다.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

[18] 무덤가 마을에 살고 있어요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8] 무덤가 마을에 살고 있어요 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8.29. 00:01   곁에서 파리쫓는 것도 오늘이마지막인가寝(ね)すがたの蠅追(はえお)ふもけふがかぎり哉(かな)잇사(一茶·1763~1828)는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오늘인가, 내일인가, 이 세상과 이별할 날을 겸허히 기다리는 아버지 곁에서 손으로 휘휘 파리를 쫓으며 이 시를 썼다.아무리 맛있는 것을 가져와도 먹지 못하고,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보고 들을 기운이 없는 병든 아버지에게 자식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는 파리를 쫓는 일뿐. 그조차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아버지 임종 일기’에 낱낱이 적혀 있다. 한 달여간 아버지를 간병하며 기록한 작별 일기다. ..

[17] 유유히 마음 가는 대로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7] 유유히 마음 가는 대로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8.07. 23:50업데이트 2024.08.26. 15:40  대자로 누워잠이 드는 시원함쓸쓸함이여だいじ ね すず さび大の字に寝て涼しさよ淋しさよ헉헉, 더워도 너무 덥다. 밖에 나갔다가는 “여름아, 살려줘!”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려드는 요즘이다. 들어오면 제일 먼저 냉장고를 열어 꿀꺽꿀꺽 냉수를 마신 뒤, 땀에 젖은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찬물로 샤워한 다음, 살에 닿는 면적이 최소인 옷을 입고 까끌까끌한 이불 위에 대자로 드러눕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가 부드러운 바람을 내뿜으며 차가워진 온몸을 훑어갈 때면 그제야 찾아드는 평화. 아아, 살 것 같네.한여름, 대자로 누워 잠이 드는 시원함에는 억만금을 준..

[16] 어떤 울부짖음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6] 어떤 울부짖음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7.24. 23:52    대지는 지금고요히 흔들려라기름매미여だいち ゆ あぶらぜみ大地いましづかに揺れよ油蝉아침부터 맴맴, 맴맴. 드디어 나타났다, 한여름의 사랑꾼. 짝을 찾는 뜨거운 목소리에 하늘이 울리고 대기가 요동치니 그 생명의 기운으로 대지마저 흔들리는 듯하다. 모더니즘 하이쿠 시인 도미자와 가키오(富澤赤黄男, 1902~1962)의 한 수다.기름 매미는 찌르르르, 찌르르르 우는 소리가 기름 끓는 소리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과연 저 나뭇가지 위에서 뜨겁게 달군 기름에 튀김옷 튀기는 소리가 나고 있으니, 기름 매미의 애타는 구애에 애먼 사람 마음도 흔들릴 지경이다. 아니면 뜨거운 여름날이 너무 좋아 저렇게 비명을..

[15] 매실이 익을 무렵 콩국수를 먹지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5] 매실이 익을 무렵 콩국수를 먹지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7.10. 23:50업데이트 2024.07.11. 07:54  후드득 소리에귀도 새콤해지네매실 비ふるおと みみ なるうめ あめ降音や耳もすふ成梅の雨푹푹 찌는가 싶더니 요즘은 날마다 비 소식이다. 장마에 들었다. 장마는 비를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이 길 장(長)을 만나 생긴 말이다. 과연 비가 길게도 내린다. 습한 공기가 대기에 꽉 차 수영장 물속을 걷듯이 축축하고 묵직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숲길을 걷다 보니 발밑 여기저기 초록색 열매가 떨어져 있다. 매실이다. 그렇구나. 장마철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계절이구나.일본에서는 장마를 매실 매(梅)에 비 우(雨)를 붙여 ‘梅雨(쓰유)’라고 한다..

[14] 소소한 일상을 표현하며 살아가기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4] 소소한 일상을 표현하며 살아가기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6.26. 23:57   불을 껐더니시원스러운 별이창으로 드네灯[ひ]を消[け]せば涼[すず]しき星[ほし]や窓[まど]に入[い]る연일 무더위가 이어지니 여름은 여름이구나 싶다. 그래도 해가 지면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한낮의 불볕더위에 지친 인간을 위로한다. 그런 여름밤이면 하나둘 떠오른 푸른 별이 더욱 청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원스러운 별은 여름의 계절어였다.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도 백여 년 전 어느 여름밤 그런 별을 보았다. 오사카로 강연하러 갔다가 위궤양으로 쓰러져 인근 병원에 입원한 소세키는, 침상에 누워 병실이 밝을 때는 보이지 않던 별이 불을 껐더..

[13] 꽃잎의 색처럼 시대의 색도 변한다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3] 꽃잎의 색처럼 시대의 색도 변한다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6.12. 23:52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수국이어라쪽빛으로 변하는어제와 오늘 あじさい紫陽花やはなだにかはるきのふけふ 나의 일본인 친구 마이코는 홋카이도에서 중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십몇 년 전쯤 도쿄에서 같이 문학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사이다. 그때 마이코는 하이쿠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지금 마이코는 삿포로의 정서를 담은 하이쿠를 동인지나 작은 모임에 발표하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한다. 하루는 그런 마이코와 라인으로 통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슌챵, 요즘 학교에서 보면 어린 친구들이 한국을 얼마나..

[12] 아침 얼굴의 씨앗을 뿌리며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2] 아침 얼굴의 씨앗을 뿌리며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5.22. 23:50업데이트 2024.05.27. 15:11   나팔꽃에게두레박을 빼앗겨물을 빌렸네 朝顔[あさがお]に釣瓶[つるべ]とられてもらひ水[みず] 때는 1700년대 초. 지금처럼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시대가 아니다. 아침밥을 지으려면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가야 한다. 이른 아침, 촉촉한 이슬을 밟고 새소리를 들으며 우물가로 다가간 한 사람이 두레박을 던지려는 찰나, 저런! 벌써 두레박을 차지한 생명이 있네. 안녕, 나팔꽃. 밧줄에도 푸릇푸릇한 줄기가 빙글빙글 덩굴져 있고 여기저기 보랏빛 꽃도 싱그럽다. 물을 길으려면 이 아침 귀한 생명을 죽여야 한다. 물 길으러 온 사람은 입가에 빙긋 미소라도..

[11] 여름의 문턱에서 살랑살랑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1] 여름의 문턱에서 살랑살랑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5.09. 00:34업데이트 2024.05.27. 15:10  새잎에 부는바람이 살랑살랑귓가에 닿고 若葉吹[わかばふ]く風[かぜ]さらさらと鳴[な]りながら 어느덧 여름의 문턱, 입하에 들어섰다. 이제 계절은 풋풋한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파릇파릇 돋아난 새잎이 따사로운 볕을 쬐고 자라나 신록은 눈이 부시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 이파리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다가온다. 종종 내리는 비에 초목은 더욱 싱그럽게 자라나 저마다의 깊이로 초록을 발한다. 아름다운 오월의 한 줄기 바람을 그대로 문자로 옮겨 놓은 듯한 이 하이쿠는 말하듯이 자연스러운 구어체 시로 이름난 ..

[10] 밥을 짓는 시간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0] 밥을 짓는 시간 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4.24. 23:56업데이트 2024.04.29. 10:18   나라의 차밥기다리는 동안에등꽃을 보네 奈良茶飯[ならちゃめし]出来[でき]るに間[ま]ある藤[ふぢ]の花[はな] 배가 고프다. 밥솥을 열어보니 비어 있다. 밥해야겠네. 밥 짓는 시간은 15분에서 30분 사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배가 고플수록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딱딱한 쌀이 물기를 가득 머금은 찰진 밥으로 변신하는 마법 같은 시간. 귀찮아 라면이나 빵으로 때우려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사람이란 그 사람이 먹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도 그런 말을 남겼다지. 빨리 해치우는 식사는 바람처럼 가벼운 인간을 낳는지도 모른다. 정성을 들이자. 이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