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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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3

[3]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을 때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3]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을 때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1.18.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4  꾸벅 졸면서나에게로 숨을까겨울나기여 居眠[いねぶ]りて我[われ]にかくれん冬[ふゆ]ごもり 아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당시 도쿄에서. 일본 친구와 함께 그날 본 조조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다가 심상치 않은 진동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온 세상이 흔들린다. 신주쿠의 빌딩 숲. 도망칠 곳이 없다. 숨을 곳이 없다. 땅이 파도치니 뱃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의 고층 건물이 앞뒤로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벽 울림이다. 저 벽이 무너지면 나는 죽겠구나...

[2] 새해가 밝다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 새해가 밝다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1.04.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3    새해가 밝아생명 또한 그대로밝아오누나 初[はつ]あかりそのままいのちあかりかな 새해 새날이 밝았다. 그 환한 빛으로 만물에 새삼 생기가 도는 듯하다. 신년의 계절어 ‘하쓰아카리(初あかり)’는 한 해의 맨 처음 밝아오는 빛을 이른다. 그 빛이 세상을 비추자, 지상의 생명도 환하게 밝아온다. 새해 첫 빛을 만끽하며 살아 있는 감격을 노래한 이 시는 하이쿠 시인 노무라 도시로(能村登四郎, 1911~2001)가 썼다.새해에는 우리네 얼굴에도 환하게 해가 뜬다. 조선의 서촌에 살며 이런저런 사람 사는 모습을 글로 남긴 김매순(1776~1840)의 ‘열양세시기’에는 “설..

[1] 동짓날 팥죽과 유자 목욕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 동짓날 팥죽과 유자 목욕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3.12.21.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2   동짓날 햇살다정하게 다가와무릎에 앉네冬至の日しみじみ親し膝に来る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동지에 해가 짧아져 추워진 줄만 알았는데, 태양이 가장 낮게 뜨니 햇살이 창문 너머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다가와 무릎에 앉는다. 데면데면하게 창가에서 놀던 햇살은 어느새 곁에서 속살대는 벗이 되었다.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햇살과 가장 다정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북반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소를 지을 법한 이 하이쿠는 온화한 작풍으로 이름난 도미야스 후세이(富安風生·1885~1979)가 썼다.동짓날 햇살에 다정한 마음이 있다면, 동지팥죽 속에는 쫀득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