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99

봄, 혼자 커가는 그리움

봄, 혼자 커가는 그리움 권애숙 (시인) “어느 계절이 좋아요?” 언젠가 누가 불쑥 물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4계절 열두 달이 휙휙 전신을 디디고 지나갔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이, 가수 빅뱅의 노래 ‘봄여름가을겨울’이, 겨울에 당도해 있는 어떤 이의 전생 같은 계절들이, 겹쳐 흘렀습니다. ‘생은 이런 것이야’ 하는 듯 웃으며, 울먹거리며, 생의 희로애락을 보편적인 상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서로 인접한 것들은 서로에게 스며들어 많든 적든 간섭을 합니다. 한 줄에 연결된 혈육처럼. 사계 역시 서로 연결고리로 이어져 앞뒤의 계절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요. 봄에 태어난 것들에선 겨울의 냄새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겨울의 차고 매서운 추위를 건너왔기에 또 어떤 계절..

소박한 개별자

소박한 개별자 글: 정병근 (시인) 나호열 시인은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후 올해로 시력 38년째를 맞고 있다. 그간 20여 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쉼 없는 시 인생을 노정하고 있다. 그와 나는 중랑천을 사이에 둔 이웃이다. 나는 노원구에 살고 그는 도봉구에 산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중랑천을 산책한다. 그는 만날 때마다 당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다채롭고 재미있는 경험담을 들려준다. 군대 이야기에서부터 전국의 지리와 인물에 대한 촌평에 더하여 지역별 부동산 시세까지 꿰뚫는 탁견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물 반 물고기 반 시절의 낭만이 그립기도 하다. 나호열 시인의 시를 한 마디로 가벼이 말하는 것은 누가 될 듯하다. 칠순에 이른 인생의 깊이와..

ㅁ 봄 -나호열 어쩔 수 없다 눌러도 눌러도 돋아오르는 휘영청 수양버들의 저 연둣빛 회초리 바람 맞은 자리마다 까르르 웃음소리 (감상) 어디선가 봄이 오는 소리,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금세 온다고 하지 않던가 지난 겨울은 참으로 혹독하였다 폭설과 한파로 세상은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호숫가를 거닐다보면 연둣빛 버들가지가 새초롬히 흔들흔들 지나는 사람에게 빙긋 미소를 보내는 듯하다. 낭창낭창한 버들의 유혹에 잠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디선가 휘파람소리 버들피리 소리도 들리듯한 환상에 빠진다. 휘영청, 희미한 낮달도 그 유연한 버들가지의 춤에 발을 삐어 절뚝거리며 호숫가를 배회하는 듯한 착각에도 빠진다. 휘영청, 시인도 그 풍경에 동화되어 휘휘낭창 품속에 있던 하모니카도 입술에 물고 봄처녀..

이완근의 詩詩樂樂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2) 안부(安否) 나호열(1953~ )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 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픈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 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

산다는 것 / 나호열

산다는 것 / 나호열 ​ 집으로 돌아가는 촌로 부부를 태웠다. 직업이 뭐요? 학 교에서 학생들 가르칩니다. 아!. 그거 좋지. 난 배우는 사 람이요. 땡감만 열려 매년 골탕 먹이는 감나무한테. 삽질, 쇠스랑질에 돌만 솟아오르는 땅한테. 제멋대로 비 뿌리 고 제멋대로 비 거두어가는 하늘에...... ​ 옆에서 할머니가 거들었다. 소득 없는 일에 저렇게 매 달리는 법만 평생 배워야 소용없소. 거두어들일 줄 알아 야지. ​ 논둑에 들깨가 한창이었다. 아, 저 깨들 좀 봐. 정말 잘 영글었네. 내 새끼들 같다니까. 올해 깨 심었는데 내 눈에 는 깨밖에 안 보여. 온통 깨밖에 없다니까. 말 못하는 저 것들도 사람 정성은 알지. 마음 좋게, 편하게 정성을 다하 면 보답을 한다니까, 아! 저 영근 깨들 좀 봐요, 저..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임요희의 詩요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스카이데일리2023-09-30 10:51:21 백지 / 나호열 시인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 백지(2007)/ 나호열 ▲ 백지는 없다. 백지의 전생 위에 빼곡하게 쌓인 흰 눈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글 쓰는 직업..

비애에 대하여

비애에 대하여 나호열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에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걱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톳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서범석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 시집 『안부』, 밥북, 2021. ‘비애에 대하여’는 시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며 그것을 강조한다. 누구의 비애인가. 시의 서정적 자아는 베틀을 객관적 상관물..

사랑의 온도

사랑의 온도/ 나호열 경상매일신문 기자 / gsm333@hanmail.net입력 : 2023년 05월 10일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뎁힐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

타자 지향의 시 쓰기

타자 지향의 시 쓰기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들어가며 나호열 시인은 수식어를 달기 곤란한 시인이다. ‘원로’ 시인이라 하기에 그는 너무 젊다. 정신도 육체도 아직 젊고 활달하다. 그렇다고 ‘중진’ 시인이라 부르기에는 그의 문단 경력과 시력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국민’ 시인이라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대중적이거나 야단스러운 행보를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우리 문단의 한쪽에서 알곡같이 알찬 작품을 써온 시인이다. 그런 그에게 구태여 수식어를 붙이자면, 그는 ‘진짜’ 시인이다. 이번에 그가 2008년 이후 시들 중 중요 작품을 선별하여 시선집 2부를 묶었다. 이 작업에 해설자로 참여하게 되어 큰 부담도 되지만 한편으로 영광스럽기도 하다. 이번 ..

산다는 것은

[시인의 詩 읽기] 농사를 짓는 일은 사랑 아닌가요 입력 : 2023-04-28 00:01 수정 : 2023-04-28 05:01 노부부의 말씀이 한권짜리네요. 농사를 지으며 매번 허탕을 치는 자기 자신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또 잘 여물어가는 들깨를 보고 주인 참 실한 사람이겠다 말씀하시는 것도요. 우연히 마주친 두 분 말씀에는 우주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나호열 시인의 이라는 시에서 만난 한 장면입니다. 저도 가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말씀을 들을 때가 있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짧은 말 한마디가 머리를 치고 내려와 심장에 고일 때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중국 칭다오의 문학 행사에 와 있는데 어제는 산책길에 너무나도 거대한..

우리동네 마을버스 1119번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2017-08-28 20:01:12 우리동네 마을버스 1119번 마을버스는 이 마을 저 골목을 둘러서 가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지 한순간이던 깨달음 인생을 평생을 살아야 겨우 닿는 것처럼 빠르게 가는 법이 없지 나는 지금 종점으로 가고 있어 4.19 묘지가 종점이지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아 빈 배가 빈 배를 싣고 가는 것이지 아직 몇 정거장 더 남았어 잠깐이지만 꿈 좀 꾸어야겠어 현실을 벗어나는 꿈길 그래도 1119번 마을버스는 달리고 달리고 있어 나호열 시인의 인생에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평생을 걸려 알게 되는 것도 있죠. 하지만 천천히 달리는 인생 덕에 우린 많은 사람도 만나고 생각도 하고, 꿈도 꿀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마지막에 다 다를 때까지..

염결한 고독자의 시

염결한 고독자의 시 정병근 (시인)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아침이 전해준 새 소리」 전문,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결이 없다』 나호열 시인은 살아온 이력만큼 다채로운 경험을 지닌 시인이다. 시라는 화두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걸어온 긍지가 시와 인품에 배어있다. 이 글은 나호열 시인이 37세부터 55세까지 상재한 8권의 시집에서 뽑은 1..

시인들의 마니또이자 견인차

시인들의 마니또이자 견인차 – 나호열 시인-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시작되고 다음날인 1월 2일 나는 나호열 시인 화를 드렸다. 금년에 칠순을 맞이하는 나호열 시인의 문학을 평소에 동경해왔고, 그의 맑고 정의로운 문학세계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었는데, 요즘은 우연하게도 페이스북을 통하여 나호열 시인과 자주 소통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그를 2022년 상반기호 ≪스토리문학≫ 메인스토리에 모시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난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은 나호열 시인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리하여 나호열 시인은 새해가 되자마자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우리 스토리문학을 선택해주었고, 1월 4일 첫 출근 날 일찍 스토리문학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우리 일행은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당신이라는 말

당신이라는 말 - 나호열 양산 천성산 노전암 능인스님은 개에게도 말을 놓지 않는다 스무 첩 밥상을 아낌없이 산객에게 내놓듯이 잡수세요 개에게 공손히 말씀하신다 선방에 앉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싸우든 말든 쌍욕 앞에 들어붙은 개에게 어서 잡수세요 강진 주작산 마루턱 칠십 톤 넘는 흔들바위는 눈곱만한 받침돌 하나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구르지 않는다 개에게 공손히 공양을 바치는 마음과 무거운 업보를 홀로 견디고 있는 작은 돌멩이의 마음이 무엇이 다른가 그저 말없이 이름 하나를 심장에게 꺼내어 놓는 밤이다 당신 viewer 북해도 아이누 족들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불렀다고 한다. 사람을 가리키는 ‘아이누’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과 물상을 신으로 호명하는 ‘카미’가 그것이다. 그들에게는 곰도 신이었고, 연..

이름을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나호열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몇 잎 붉게 피어난다 이제는 옛집으로 남은 사람아 끝내 종착역은 더 멀리 떠나 내 몸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어둠을 걸어 닿으리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끝끝내 피어있는 동백아 가여운 내 몸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깃든 장항선 철길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이름은 형상이 없는 언어의 움직임이다.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사물 ,단체 현상 등에 붙여서 부르는 기호는 형상을 설명하던가 불러주기 위하여 짓는다. 보이지 않으나 분명 존재하고 모든 것들과 구별되어 고유의 명칭을 부여 받는다. 존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