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망각은 하얗다 1991 42

나는 말해야겠다

나는 말해야겠다 나는 말해야겠다 탐스러운 몇 송이 꽃을 들고 될 수 있으면 상냥하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숨긴 채 레지스탕스처럼 은밀히 나는 말해야겠다 달콤하게 죽을 수 있다면 사랑하자고 미움과 적의 마저도 사랑하겠노라고 복음을 전파하는 군중 속의 어릿광대 불온벽보와 같은 시간을 지나 충혈된 후렛쉬의 검문을 피해 빨리빨리 불질러 버려야 겠다 통곡의 벽에서 기도가 끝나기 전에 나는 말해야겠다 되돌아 서서 고개를 흔들며 부인하기 전에

심야통화

심야통화 - 숲에서 오, 살아 았었구나 조심스레 밤길을 걸어온 그대 그 목소리, 그 마음이 닿아 나는 도 이렇게 천 리밖에서 그대를 만나는구나 고압선이 지나가는 허공에 매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지하에 묻혀도 꿈틀대던 그 목소리 죽지 않고 살아 죽지 않고 천 리 밖 내 가슴을 찌르는구나 이 밤에 돌아가야 할 길이 얼마나 많은 지 두통처럼 짓누르는 어둠 속으로 무거운 발자국 소리들이 흩어진다, 한 번 두 번 길게 세상이 조용히 울리고 있다 잠들었는가 잠들었는가 받을 사람은 없고 소쩍새의 신호음이 밤새 울리고 있다

茶毘

茶毘 맑은 창 너머 당신은 이렇게 눈물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아무 뜻없이 성기는 눈발 당신의 말씀으로 활활 타오르는 동안 다져입은 옷소매로 스며드는 회귀의 굴레 천천히, 어둠이 길을 끊어내고 있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울리는 온몸의 물소리 죄다 쏟아내고 눈물도 말라버린 후 이제야 당신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플 때는 더욱 아프게 박아두라고 당신은 몇 개의 못을 내게 전해 주셨습니다

지우개

지우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허물어 보아도 흔적조차 없는 길 밖의 길 입니다 한올씩 풀어 내보는 말씀 하나도 오히려 노을 지듯이 때가 타는 부끄러움입니다 아! 멀기도 하다 전애절벽 한 가운데 부처가 있습니다 눈에도 돌이 들고 일월을 받아 한층 짙어가는 돌의 미소 입니다 오르지 못하는 상징으로 여울지며 매운 머리를 돌아가는 새입니다 아! 지나쳤구나 자리를 옮기면 이미 그 곳에는 또 마음이 없습니다

손 악역을 떠맡은 하수인이였을까 시키는대로 충직하게 어김없이 해치우는 망나니였을까 먹을 것을 가져오라 음식을 입 가까이 나르며 도대체 주인이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내였을까 손은 지금 복역중이다 평생을 노동역에 처해져 때묻은 발을 씻어내며 헛것만 보이는 눈물을 닦아내며 굴종의 외로움을, 미덕을 배우고 있다 마음이 평화로울 때 비로소 가지런히 모두어지는 거룩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