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바람과 놀다 (2022.12) 34

오리털 이불

오리털 이불 한결같이 입을 봉한 이불들따스함에 깃드는 내력이가볍게 잠 위에 얹힌다흘러가는 청명한 물소리풀 먹인 옥양목 같은겨울 하늘을 저어가던끼룩대는 울음소리안락한 잠은 갈대 기슭에 닿고꿈속에서 부화하는몇 개의 알이 보인다일렬종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눈 가린 오리들의 미래가끔씩 봉합되지 않은 생애의 틈새 사이로조금씩 빠져나오는 깃털을 보며없는 날개를 몸서리로 친다

투우鬪牛

투우鬪牛  그랬었지. 붉은 천 펄럭이는 깃발을 향해무조건 돌진하던 철 모르던 시절도 있었지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불끈 코힘을 내뿜으며 오만과도 같은뿔을 믿었지그때는 화려했었어, 흙먼지가 일도록터져나오는 함성과 박수갈채만 있으면두려운 것이라곤 없었지신기루 같았어온톤 환각제뿐인 붉은 깃발은 사랑이 아니었어사랑 뒤에 숨은 그림자, 그것은 분노였어깨달을 새도 없이 사납게 길러진 우리,풀 대신 피 냄새를 맡으며 자라난 우리밭갈이나 달구지를 모는 대신원형경기장에 길들여진 그것이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고슴도치처럼 소심하게등에 꽂힌 무수한 창칼에도 아픔을 모르는 채또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늙은 소들

코뿔소

코뿔소 둥글둥글 살아가려면 적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다가도생존은 싸늘한 경쟁이라고 엄포도 놓으시던어머님의 옳고도 지당하신 말씀고루고루 새기다가어느새 길 잃어 어른이 되었다좌충우돌 그놈의 뿔 때문에피해서 가도 눈물이 나고피하지 못하여 피 터지는삿대질은 허공에 스러진다이 가슴에 얹힌 묵직한 것성냥불을 그어대도 불붙지 않는 나의 피채찍을 휘둘러도 꿈쩍을 않는고집불통 코뿔소다힘 자랑 하는 코뿔소들 쏟아지는 상처를 감싸쥐고늪지대인 서울에 서식한다코뿔소들이 몰래 버리는이 냄새나는누가 코뿔소의 눈물을 보았느냐

누에

누에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수천 년 동안누에는 그의 속성을바꾸어 본 적이 없다뽕나무는 뽕나무대로누에밥이 되는즐거움의 생활방식을바꾸어 본 적이 없다 한 마리 나방이 되기 위하여수고스럽게 고치를 지어야 하는 노동을생략하지 않는다한숨인 양 뿜어올리는 실오라기를한 줄씩 잡아당겨 명주를 만드는착취의 손에 대하여이빨 한 번 드러내지 않고집 잃어 징그러운 몸뚱이로이리저리 비틀며몰매 때리는 세상 밖으로길을 만들며 죽어 간다

젖소

젖소 젖소는 일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풀과 사료를 먹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젖을 만든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고무장갑의 큰 손이 우유를 가져가기 위해 방문한다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들에게 젖소는 반항하지 않고 화내지도 않는다 젖소는 제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결코 젖소는 제가 젖소인지 모른다 대를 물려가는 혈통은 검은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면서 서정적인 목장 풍경 속에 우리의 뒷골 속에 되새김 되는 초식동물 우리의 뒷모습을 오늘도 보지 못한다

목발 11― 나들이

목발 11 ― 나들이 한 사람은 부끄러워서 한 사람은 어색해서 평생 손 마주 잡지 못했다 오늘은 고샅길 지나 꽃구경 간다 날마다 지게 지고 소쿠리 이고 다니던 산길에 산수유도 피고 매화도 활짝 얼굴을 폈다 허리도 굽고 다리 힘도 없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 꼭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부끄러움도 없이 어색함도 없이 한 그루 꽃나무로 피었다

의자 4

의자 4 사람은 의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려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줄 때 일 것이다 의자는 오랜 시간 홀로의 시간을 견디고 자신에게 아무런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잠시 고단한 발걸음을 멈춘 이들이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하여 하인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미련 없이 떠나는 그때까지 묵묵하게 무게를 견딜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의자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허물어 쓰레기가 되어 산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마땅히 의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닮은 어떤 일들에 필요한 노역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랑의 온도

사랑의 온도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데울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

거문고의 노래 2

거문고의 노래 2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울 밖에 서 있겠네 내밀한 그 마음이 궁금하여 키를 세우고 또 세우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열하고도 여덟이나 아홉이 되었을 때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려 당신이라는 사람을 안을 수가 없었네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마음에 둥지를 틀겠네 봄이 다 가기 전에 꿈이 사라질까 자고 자고 또 자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스물하고도 또 스물을 더했을 때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려 날개 없는 나비가 되었네 당신이라는 사람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그 오동나무와 그 누에고치는 속이 텅 비고 바람보다 가는 실이 되어 거문고가 되었네 만리 길의 첫 걸음처럼 막막하여 낮게 하르르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꽃잎의 한숨처럼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고 싶은 노래는..

땅에게 바침

땅에게 바침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