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부 (2021.12) 68

연리목을 바라보다

연리목을 바라보다   강둑에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바닷가 파도소리에 키를 세우는 나무들깊은 산중 적막을 수행하는 나무들산마루 허리 꺾고 넘어질듯 넘어지지 않은 나무들그 나무들 오늘은 고고한 탑으로 내 앞에 서 있다어디를 둘러보아도 얼굴 보이지 않는오래된 시계를 몸 어딘가에 감추어 놓은울울함을 바라보며아득한 먼 옛날 씨앗으로 움트던 날을 기억한다생전에 그늘을 바라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달디 단 열매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흙속에 마음을 묻은 사람처럼나도 한 그루의 작은 나무를 심는다흰 구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날개를 가진나무는어느 생에 저 창공을 박차고 올라마악 사랑을 배우는 사람들의 눈빛을 닮은 별이 될 것이므로나는 한 그루 나무속에 내 이름을 숨기려 하니나이테 속에당신의 숨결로 빚은빛나는..

안부 (2021.12) 2024.05.27

진화론을 읽는 밤

진화론을 읽는 밤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 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 말 그렇게 믿어왔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의 조롱으로 메아리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삵에게 쫒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 만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새가 되리라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안부 (2021.12) 2024.04.06

만종 晩鐘

만종 晩鐘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고 짐승들의 고막을 찢던 포탄이 종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에 모습을 드러내는 달과 밤이면 새싹처럼 돋아나던 별들 그 만물이 일러주는 시간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숨처럼 논둑길을 달리고 성황당 고개 너머 얕은 토담을 끼고 돌아 누구나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너와 나의 어깨에 얹히는 위로의 손길 어디서 날아왔는지 말하지 않는 철새들에게 가슴을 내주는 겨울 들판까지 종소리는 무작정 달려옵니다 무엇을 섬기든 고개 숙이고 감사의 시간을 선물로 주는 산골짜기의 종은 살생의 폭약을 가득 안았던 포탄 그 속이 비워지고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생명의 시간을 저 혼자 일러주는 만물의 종이 되었습니다

안부 (2021.12) 2024.03.28

면벽

면벽 아무도 묻지 않고 나도 묻지 않았다 한 때는 뾰족한 아픔이 새 순으로 돋아오를 때라고 믿기도 하였으나 먼 길을 걸어온 늙은 말 등에 얹힌 짐이 한 줌도 되지 않는 세월의 무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눈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세찬 빗줄기 꽂히는 아스팔트를 쪼아대는 비둘기의 투쟁과 몇 알 좁쌀을 입에 물고 무소유의 집으로 돌아가는 콩새가 전해주는 무언의 감사와 꽃도 아니라고 코웃음 치던 들판에 십자가처럼 피어나는 개망초의 용서가 아직 뜨거운 심장에 한 장의 편지로 내려앉을 때 눈물은 오늘을 사는 나의 양식 오롯이 가식의 옷을 벗는 영원으로 가는 첫걸음 지상에서 배운 첫 낱말 혼자 울 때 아무도 호명하지 않은 꽃으로 핀다

안부 (2021.12) 2024.03.22

폭포의 꿈

폭포의 꿈 나는 폭포를 사랑해 아니 나는 폭포와 같은 사랑을 사랑해 저 단호한 번지 점프 차갑고 정갈한 저 얼굴을 어떻게 일획의 붓으로 하얗게 그리고 말겠어 당신은 꿈으로 웃고 있는데 한 줄기 바람이 와르르 늦은 봄날의 벚꽃 잎으로 화폭을 채우네 손길이 닿지 않는 어드메 쯤에서 나는 다시 당신을 그리네 하늘과 맞닿은 고향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수 만 마리의 열목어가 이룩하는 용오름 속에 나는 선녀의 옷을 감춘 나무꾼을 그려 넣네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폭포는 하늘을 향해 가는 사다리 나는 폭포를 사랑하네 아니 나는 아무도 모르는 폭포의 꿈을 사랑하네

안부 (2021.12) 2024.03.11

사막의 꿈

사막의 꿈 어느 사람은 낙타를 타고 지나갔고 순례자는 기도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때마다 화염을 숨기고 뜨거워졌다가 밤이면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빛으로 얼음 속에 가슴을 숨겼다 나에게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침묵과 고요 속에서 태어난 바람으로 지우며 육신의 덧없음을 일깨우곤 했다 오늘도 낙타의 행렬과 순례자들이 덧없이 지나갔지만 나는 꿈을 꾼다 그 사람이 오고 백년 만에 비가 내리고 백년 만에 내 몸에서 피어나는 꽃을 어쩌지 못한다 안녕이라는 꽃말을 가진 사람

안부 (2021.12) 2024.03.07

매미

매미 오랫동안 꿈만 꾼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새로 태어났기에 바다를 건너는 게 꿈이었는데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픈 게 날개가 돋치는 까닭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너에게 불러줄 세레나데는 성대가 없어 그저 날개를 부르르 떨어야 울음 삼키는 몹쓸 날개 그래도 너는 오겠지 웃음소리가 아니어도 나무 하나를 너끈히 들어올리는 절창을 모른 척 하지는 못하겠지 새로 태어났으나 새가 되지 못한 그저 가슴 속에 출렁거리는 바다를 이렇게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안부 (2021.12) 2024.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