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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들풀 / 민병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7. 4. 16:02

들풀

     민병도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

누가 이 땅의 주인입니까

 

여름 내 묵혔던 텃밭에 예초기의 날카로운 고음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하면 풀들은 비명도 없이 드러눕습니다. 서너 시간 제초를 하고나면 칼날 주변이 초록의 섬유질로 두툼한 푸른 갑옷을 입지요. 이제는 낫보다 익숙해진 예초기 풍경입니다.

한반도 역사에 있어 수많은 왕조가 거쳐 갔지만 현재까지 살아남은 왕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통치의 대상으로 삼았던 민초라 불리는 백성들만이 여전히 들풀처럼 남아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벤 자는 사라지고, 베인 자는 “저를 벤 낫을 / 향기로 / 감싸”고 여직 살아남은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 땅의 주인이고 점령자라 주장합니까. 죽어서도 살아있고, 허리가 잘려도 향기를 내뿜는 민초가 영원히 이 땅의 주인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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