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공부할 시 21

만항재

중앙선데이입력 2024.11.16 00:01만항재황동규하늘 한가운데가 깊어져대낮에도 은하(銀河)가 강물처럼 흐르는만항재 늦가을저 밑 침엽수림들이 물속처럼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바람에 손을 씻었다.은하 가운데 머뭇대던 구름 한 장 씻은 듯 사라지고열 받은 차가 하나 서 있다얼마나 높은 데 길들이면자신의 신열(身熱) 들키지 않고삶의 고비들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기후와 환경의 영향으로 나무가 살지 못하는 곳, 이 시작점을 사람들은 수목한계선이라 부릅니다. 위도가 높아 추운 극지방, 고온과 낮은 습도의 사막, 혹은 고도가 높은 산악지대 등에 이 수목한계선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수목한계선이라 하더라도 전혀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의 나무들은 스스로 키를 낮추..

공부할 시 2024.11.19

[40] 가을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40] 가을문태준 시인입력 2024.10.14. 00:08 일러스트=김하경가을기쁨을 따라갔네작은 오두막이었네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산이 말했네어서 가 보게, 그대의 집으로……-강은교(1945-)오두막에 슬픔과 기쁨이, 이 둘이 살고 있는데 번갈아 집을 지킨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집에 오막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가을에는 찬바람이 불어 쓸쓸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니 세상의 모든 집이 오두막집으로 보이기도 한다.나도 시월의 오두막에 살짝 가서 보았다. 조랑조랑..

공부할 시 2024.10.14

도착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38] 도착문태준 시인입력 2024.09.29. 23:52  일러스트=이철원 도착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지는 것도 괜찮아지는 법을 알았잖아슬픈 것도 아름다워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벌레 먹어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이대로눈물나게 좋아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여기 도착했어-문정희(1947-) ‘역’은 열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곳이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의미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어떤 단계나 대목, 혹은 막다른 곳을 함께 뜻한다고 보아도 좋겠다. 아니면 지나온 일과 여정을 돌이켜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는 어떤 언덕 같은 곳이라고 이해할 수..

공부할 시 2024.09.30

산그늘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36] 산그늘문태준 시인입력 2024.09.08. 23:52  산그늘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이상국(1946~)일러스트=이철원 시인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을 회상한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에 다녀온 어머니는 아이를 품에 안아 젖을 물리면서 먼 산에 산그늘이 내린 것을 망연히 바라본다. 하루의 해가 뉘엿뉘엿 기운 무렵이었을 것이다. 장성(長成)한 시인은 어느 날 옛집에 들러 산그늘을 바라보면서 그때의 어머니를 생각한다.시인은 그동..

공부할 시 2024.09.12

베개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35] 베개문태준 시인입력 2024.09.01. 23:52  베개옆으로 누운 귀에서 베개가 두근거린다베개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난다동맥이 보낸 박동이 귀에서 울린다심장이 들어오고 나가느라베고 있던 머리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베개와 머리 사이엔 실핏줄들이 이어져 있어머리를 돌릴 수가 없다숨소리들이 모두 입술을 벌려베개에서 출렁거리는 리듬을 마시고 있다고막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잠든 귀를 지나 꿈꾸는 다리로 퍼져간다소용돌이치는 두근두근을 따라온몸이 동그랗게 말려 있다-김기택(1957~)일러스트=김하경모로 누워서 베개에 머리를 괴었을 때의,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경험을 어떻게 이렇게 다각적으로, 결을 달리하면서 표현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시는 사물의 편에서, 베개의 쪽에서 ..

공부할 시 2024.09.02

[148] 인연

[최영미의 어떤 시] [148] 인연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입력 2023.12.04. 03:00업데이트 2024.03.26. 15:04   일러스트=이철원 인연맨 처음 만났을 때우리는 모르는 사이였지그 순간을 생각하면가슴이 두근거려하마터면 그냥지나칠 뻔한 그 순간 나는 키가 작아 앞줄에 앉고너는 키다리.맨 뒷줄이 네 자리아, 우리가 어떻게단짝이 됐을까! 키다리 친구들과 둘러서서바람이 가만가만 만지는 포플러나무 가지처럼두리번거리다 나를 보고너는 싱긋 웃으며 손짓한다너를 보면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황인숙(1958~) 마지막 두 행이 멋지다. “내 코는 절로 벌름벌름/내 입은 벙글벙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진짜 친구를 보면 말보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친한 사람..

공부할 시 2024.08.05

[83] 병

[최영미의 어떤 시] [83] 병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2.08.15. 00:00 태어난 제 나라를 부끄러워하는 것. 지나간 사랑을 한탄하는 것. 부정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것.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술잔 들고 술 깬 후의 슬픔을 미리 생각하는 것. -사토 하루오(1892~1964) (유정 옮김) 그림=이철원 어떤 일본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정서가 비슷해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시인들과는 다른 마음의 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이 마음 바닥을 건드린다. 패배한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개인의 좌절감. 제 나라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부정하기를 좋아하나 현실을 바꿀 힘은 없고, 지나간 사랑을..

공부할 시 2024.04.09

[149] 살얼음이 반짝인다

[최영미의 어떤 시] [149] 살얼음이 반짝인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2.11. 03:00 일러스트=양진경 살얼음이 반짝인다 -첫추위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장석남 (1965~ ) 첫추위는 벌써 왔는데 살얼음을 보지는 못했다. ‘논바닥’ ‘냇가’라는 단어가 정겹다. ‘논바닥’은커녕 ‘논’도 본 지 오래되었다. 기차를 타고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논을 휙휙 지나치기는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논도 밭도 냇가도 구경 못 하니 계절 변화는 달력을 넘기거나 ‘오늘의 날씨’를 검색해야 실감 난다. 5행의 “개밥 그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개밥 그릇만 봐도 무..

공부할 시 2024.03.19

[18]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최영미의 어떤 시] [18] 이브의 딸(A Daughter Of Eve)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5.02. 15:00업데이트 2021.08.11. 14:49 한낮에 잠들어, 으스스한 밤에 쓸쓸하고 차가운 달빛 아래 깨어난 나는 바보였네. 내 장미를 너무 일찍 꺾어버린, 내 백합을 덥석 부러뜨린 바보. 내 작은 정원을 지키지 못했네 시들어 완전히 버려지고서야, 한번도 울어본 적 없는 듯 우네 오 잠들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겨울이네. 미래의 봄과 햇살 따사로운 즐거운 내일을 얘기한들 뭣하리- 희망이며 이것저것 다 사라져, 웃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나 홀로 앉아있네.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 이보다 슬픈 시를 본 적이 없다. ‘이브의 딸’ 제..

공부할 시 2024.02.02

[3] 거울(Mirror)

[최영미의 어떤 시] [3] 거울(Mirro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1.18.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거울(Mirror)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과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중략)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중략) 이제 나는 호수다. 한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 그리고 저 거짓말들, 촛불이나 달빛을 향해 간다 (중략) 내 속에 그녀는 여자아이를 빠뜨렸고, 내 속에서 늙은 여인이 날마다 그녀를 향해 솟아오른다, 끔찍한 물고기처럼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1932~1963) 1인칭 화자인..

공부할 시 2024.01.26

[74] 시계추를 쳐다보며

[최영미의 어떤 시] [74] 시계추를 쳐다보며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2.06.13. 00:00업데이트 2022.06.13. 02:13 밤이나 낮이나 한결같이 왔다 갔다 (…)언제나 그것만 되풀이하는 시계추의 생활은 얼마나 심심할꼬 가는가 하면 오고 오는가 하면 가서 언제나 그 자리언만 긴장한 표정으로 평생을 쉬지 않고 하닥하닥 걸음만 걷고있는 시계추의 생활을 나는 나는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나 역시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그저 그 세월 안에서 세월이 간다고 간다고 감각되어 과거니 현재니 구별을 해가면서 날마다 날마다 늙어가는 인생이 아닌가 늙고는 죽고, 죽고는 나고, 나고는 또 늙는 영원한 길손여객이 아니런가 -김일엽(金一葉·1896~1971) 그림=이철원 벽시계를 보며 이런 상념을..

공부할 시 2024.01.22

[85] 가난(歎貧)

[최영미의 어떤 시] [85] 가난(歎貧)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2.08.29. 00:40업데이트 2022.08.29. 00:41 안빈낙도(安貧樂道)하리라 작정했지만 막상에 가난하니 그게 안 되네 마누라 한숨 소리에 낯빛을 잃고 굶주리는 자식에게 엄한 교육 못하겠네 꽃과 나무 모두 다 생기를 잃고 책 읽어도 글을 써도 시들하기만 부잣집 담 밑에 쌓인 곡식은 들 사람들 보기에 좋을 뿐이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송재소 옮김) /일러스트=박상훈 7행의 “부잣집 담 밑에 쌓인” 곡식은 한시 원문에 의하면 ‘보리(麥)’다. 쌀이라면 모를까 보리를 부러워했다니. 다산의 어려운 처지와 당시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난(歎貧)’을 쓰기 1년 전인 1794년에 다산은 경기 암행어..

공부할 시 2024.01.08

[150] 눈보라

오피니언전문가칼럼 [최영미의 어떤 시] [150] 눈보라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2.18. 03:00 일러스트=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문태준 (1970~) ‘눈보라’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

공부할 시 2023.12.26

[146] 감

[최영미의 어떤 시] [146] 감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1.20. 03:00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허영자(許英子 1938~) 일러스트=박상훈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

공부할 시 2023.11.20

[143]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att)

[최영미의 어떤 시] [143]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att)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30. 03:00업데이트 2023.11.02. 14:57 일러스트=이철원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att)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송영택 옮김) 내 나이 또래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독일 작가, 한국에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소설로 더 알려졌지만 시도 곧잘 쓴 헤세. 중학생 시절에 그의 ‘..

공부할 시 202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