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68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 박 진 희(문학평론가 ․ 대전대 교수) 나호열 시인이 2015년 시집 『촉도』를 낸 데 이어 그의 열여섯 번째 시집 『물든다는 말』을 상재한다.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30여 년간 평균 2년에 한 권 정도로 시집을 낸 셈이니 실로 왕성하고도 꾸준한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시력이 시인 스스로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적 발전이 보이지 않으면 시를 그만 써야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시인으로부터 벌써 수차례 들어온 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시를 놓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때일까. 그것은 아마도 진실을 드러낼 완벽한 말을, 표현을 찾았을 때이거나 진실에 대한 욕망 자체가 사라졌을 때가 아닌가 한다. 진실을 포착..

행복과 항복

행복과 항복 가끔 나는 행복을 항복으로 쓴다 아차! 싶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요즘은 아예 행복을 항복으로 쓴다 항복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친다는 것 공손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 밥 한 그릇에 김치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아침 햇살에 번쩍 눈을 뜰 때도 그러했으니 나는 행복하게 항복하고 항복하니 행복하다

이순(耳順)

이순(耳順) 소귀고개 넘는다 주인과 함께 들일 마치고 서산을 향하여 무릎 꿇고 귀 세운 소 잔등에 올라타는 것이다 코뚜레 벗겨주고 워낭도 풀어주고 같이 가자 뉘엿뉘엿 저물어 가자 귀한 소식 올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잠든 적 없어 예쁘고 순하여 기쁘지 않으냐 오르는 길 힘들다 하지만 내리막길은 더 서러워 홀연히 소는 사라지고 해진 신발처럼 귀 한 짝 하늘 모퉁이에 걸려 있다 나머지 한쪽은 혹시 몰라 고개 너머에 두고 왔다

맹물

맹물 물로 보지 마! 화를 내며 돌아선 사람이여 어쩌겠나 우리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 물에서 태어나고 물 없으면 못사는데 그래서 생물인데 괴물이 되지 않으려고 세월을 붙잡고 보니 어느덧 고물이 되지 않았는가 멋쩍게 바람이 슬며시 물결로 지우는 웃음처럼 맑은 물에 고요히 얼굴을 비추어보는 것도 슬픈 장난이구나 짠맛 매운맛 다 슬그머니 사라진 맹물이면 또 어떤가

말의 행방

말의 행방 소문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 벙어리의 입과 귀머거리의 귀를 버리고서 잘못 들으면 한 마리로 들리는 무한증식의 말을 갖고 싶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과 길들여지지 않은 그리움으로 오래 달려온 튼실한 허벅지를 가진 잘못 들으면 한 마디로 들리는 꽃을 가득 품은 시한폭탄이 되고 싶었다 길이 없어도 기어코 길이 아니어도 바람이 끝내 어떻게 한 문장을 남기는지 한 마디면 어떻고 한 마리면 또 어떨까 천리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야생의 그 말

만월

만월 애써 지워버린 너의 얼굴이 앙상해진 겨울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네 가슴 출렁이던 머릿결은 바다로 가고 작은 기쁨에도 피어나던 웃음꽃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는지 지워도 지워도 그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는지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애써 차갑게 혼자 기울어가는 사람 뒤돌아 모르는 척 이름 부르면 어느새 서산 너머로 몸을 사루는가 세월을 빌어 잊은 지 오래였어도 차마 겨울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그 마음을 슬그머니 잡아 보는 밤

씨름 한 판

씨름 한 판 쓰러지면 지는 것이라고 사나운 발길에 밟히고 밟혀 흙탕물이 되는 눈처럼 스러진다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샅바를 질끈 쥐었으나 장난치듯 슬쩍 힘을 줄 때마다 나는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뭇잎처럼 가볍게 흔들거렸다 눈물이 아니라 땀이라고 우겨보아도 몸이 우는 것을 막지는 못하는 법 나를 들어 올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지금껏 알지 못하였던 어리석음을 탓하지는 못하리라 으라찻차 힘을 모아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찰나 나는 보았다 내가 쥐고 있던 샅바의 몸이 내가 늘어뜨린 그림자였던 것을 내가 쓰러져야 그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허공은 억세게 잡을수록 더 억세진다는 것을 씨름판에 억새가 하늘거린다

동행

동행 새벽인지 저물녘인지 수묵 한 문장으로 흘러가는 하루 낮에는 얼굴 마주볼 새 없이 그물코를 깁다가 뉘엿뉘엿 어스름이 질 때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 사내는 노를 젓고 아내는 강심에 그물을 던진다 백로가 던진 그림자에 놀라 잉어가 튀어 오르고 잔물결이 몇 개의 획으로 다가오는 하루치의 사랑이면 서로의 깊은 가슴이넉넉한 그물이 되는 저 묵언의 일필휘지!

알맞은 거리

알맞은 거리 너는 거기에 나는 이 자리에 당신 곁에 머물면 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동상(凍傷)에 걸린다* 그래서 길이 태어나고 너른 들판이 뛰어오지 눈빛으로 팔을 건네는 아득하지 않은 아늑한 거리 그 여백은 아쉬움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번지는 점자로 읽는 바람 채찍이 춤추는 알맞은 거리 *이세룡의 시, 「아나벨리」부분

봄눈의 내력

봄눈의 내력 이미 늦은 작별의 인사처럼 눈은 내린다 저 멀리 아득하게 휘어져 사라진 길의 뒷모습에 가닿는 낮은 목소리 이제서야 가슴에서 뛰쳐나온 그 말은 무작정 걷는다 하얀 꽃송이 같은 그 말은 하염없이 둥글기만 한 그 말은 벙어리 가슴을 가진 그 말은 오래 머물러야 할 당신의 웃음 뒤에서 피기도 전에 진다 끝내 불씨를 감춘 눈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