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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랜 강 / 공광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7. 18. 15:15

놀랜 강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고향의 향수마저도 콘크리트 잿빛으로 바뀌고

 

60년대 말 70년대 초 서울 노량진역과 역 너머 여의도 샛강은 우리들의 흥겨운 놀이터였습니다. 철길 위에 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기길 기다리고, 지루하면 샛강으로 내려가 버들치며 붕어를 잡기도 하였지요. 국립묘지 앞 동작대교 아래 강가도 좋은 놀이터 중 하나였습니다. 그 친환경 놀이터에 정부에서 한강유역정비 사업을 진행하면서 한강의 정취는 그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 수만 리 비단인데 /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 그걸”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온통 콘크리트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후 추억 속은 온통 화려한 인공조명과 콘크리트 회색빛으로 꽉 들어차 있고 달빛을 품은 계절의 색깔과 은은한 어둠은 콘크리트에 밀려 홍수처럼 기억 밖으로 떠밀려갔습니다. 결국 “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 파랗게 질린 강.”만 저 홀로 남았습니다.

이제는 그런 도시의 개발방식이 농촌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와 고향의 향수마저도 콘크리트 잿빛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사람 이야기가 넘실대고, 끈끈한 정이 밧줄처럼 질긴 그런 고향 농촌, 환하게 웃는 강은 이제 어디 가서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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