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66

의자이정록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의자가 될 수 있다면 서울 성북동 삼각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길상사는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씨가 대원각을 송광사에 시주하여 탄생한 사찰로 늘 불자들이나 사진작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법정스님께서 생전 ..

쑥부쟁이 / 박해옥

쑥부쟁이 박해옥 저녁놀 비끼는 가을언덕에 새하얀 앞치마 정갈히 차려입은 꼬맹이 새댁 살포시 웃음 띤듯하지만 꽃빛을 보면 알아 울음을 깨물고 있는 게야 두 귀를 둥글게 열어 들어보니 내 고향 억양이네 정성스레 냄새를 맡아보니 무명적삼서 배어나던 울엄니 땀내 울먹대는 사연을 들어보니 무망중에 떠나온 길이 마지막이었다는 고향집 언저리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쑥부쟁이야 쑥부쟁이야 층층시하 시집살이가 고달픈 거니 오매불망 친정붙이들 그리운 거니 옮겨 앉은 자리가 정 안 붙고 추운 것은 돌아갈 옛집을 갈 수 없기 때문이야 돌아갈 곳을 두고 온 사람들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날씨에 일본의 경제침략까지 더해져 올 여름 더위는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사상 최악입니다. 그럼에도 귀농한 시골집 버려둔 텃밭 예초작업을 하다 보니 ..

씨팔! / 배한봉

씨팔!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 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말한 것뿐이라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잘 사는 삶이다? 지난 월요일 강릉의 지인으로부터 부고장 하나를 받았습니다. “동생, 개조카가 죽었어. 눈을 뜨고 갔네.” 독신으로 반려견과 10여년 ..

꽃씨를 심으며 / 홍수희

꽃씨를 심으며 홍수희 희망은 작은 거다 처음엔 이렇게 작은 거다 가슴에 두 손을 곱게 포개고 따스한 눈길로 키워주지 않으면 구멍 난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그렇게 쉽게 잃어버리는 거다 오늘 내가 심은 꽃씨 한 톨이 세상 한 켠 그늘을 지워준다면 내일이 행여 보이지 않더라도 오늘은 작게 시작하는 거다 정작 희망이란, 불가능 한 것에 대한 간절한 화살기도처럼 시작되는 것 최근 남북 및 북미 정상 간 대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희망과 기대 이면에 새로운 절망과 우려가 동반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불가능해 보이는 너무 큰 나무를 한 번에 옮겨 심으려는 시도가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는데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희망의 씨앗은 그 이전에 이미 “내일이 보이지 않더라도 ..

씻어준다는 것 / 하청호

씻어준다는 것 하청호 어느 누구의 몸을 씻어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거친 발을 씻어준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쉼없이 흘러가며 제 몸을 씻는 저 강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가 아닌 제 스스로를 씻는 일이다 저 투명한 강물처럼 끊임없이 씻어내는 일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는 진보하고 있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합니다. 어떤 이들은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다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어느 누구의 몸을 / 씻어준다는 것은 /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느 누구의 거친 발"을 씻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 누구가..

희망정희성

희망 정희성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절망 속에서 자기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 보통의 희망은 절망을 배경으로 자라나는 음지식물과 같은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도나고 아프고 실패하면 위로 또는 격려라는 명분으로 필수 옵션처럼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송정란 시인의 시 ‘희망’에서는 “저 어두운 바닥 깊이 / 가라앉을 때마다 // 끊임없이 나를 / 밀어 올리는 / 내 영혼의 / 부력”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희망은 언제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등불 같은 단어로만 사용되어 왔고 그렇게 희망을 공급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희성 시인의 ‘희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가 그동안 “희망‘을 잘못 사..

씨 房 / 장이엽

씨 房 장이엽 아주 작은 방에서 가장 귀한 손님이 주무신다 ‘꿈의 씨’ 또한 그냥 말라 죽진 않을 것 가장 위대한 일은 소문 없이 가장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골방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은 어머니의 주름진 마음에서 유발되고, 허기진 위를 채우기 위한 갈망에서 위대한 발명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개천에선 미꾸라지 밖에 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어디선가는 기적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 “아주 작은 방에서 / 가장 귀한 손님이 주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씨앗은 얼마나 작습니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작지만 생명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매일 매시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렇듯 ‘꿈의 씨’..

소주 한 병이 공짜 / 임희구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돌아보면 유혹자는 항시 자기 자신 성경에 의하면 예수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 기도를 끝마치고 악마에게 시험을 받을 때 ..

거짓말 / 송찬호

거짓말 송찬호 우리 집 개, 돌이가 고삐를 풀고 집을 나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와 죽었다 누구한테 맞았나? 밖에서 나쁜 걸 먹었나? 아빠는 이제 개똥을 치우지 않아서 좋다 하고 엄마는 시끄럽게 짖지 않아서 좋다 하고 나는 개밥 당번을 하지 않아 좋다 다 거짓말이다 뭘 먹었기에 저리도 뻔뻔한가?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속아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근거도 없는 자신감으로 근거도 없는 예산을 펑펑 써댈 심산인가 봅니다. 똑같은 레퍼토리가 레코드판을 틀어 놓은 것 같고, 말하는 입과 듣는 귀가 다 같이 기억회로에 접속이 안 된 듯합니다. 보세요. 믹스견 돌이의 죽음 앞에서 애써 슬픔을 달래는 아름다운 거짓말을. 거짓말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감추기 위한 아름다운 거짓말에, 뒤 ..

고추잠자리 / 윤강로

고추잠자리 윤강로 녹슨 철조망 몇 가닥 걸린 말뚝에 고추잠자리 앉았다 고추잠자리는 눈 감고 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집게손가락으로 잡으려는 순간, 고추잠자리 살짝 떴다 놓쳤다 빈 손가락이 무안했다 푸른 허공에 고추잠자리 떼 휙 휙 휘파람 불면서 활공(滑空)하는 밝은 풍경, 고추잠자리 날개가 햇살의 살갗처럼 투명하다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놓치거나 실패하면 재빨리 체념하고 허공을 보았다 그렇게, 깨끗하고 배고팠다 나의 아름다운 실패 고추잠자리야 성공이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난 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애써 위로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실패를 위해 사용했을까요. 끝내 성공의 그림자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흉내만 내다 스러진 자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요. 첩첩산중에 터를 잡고 자연인으로 우유자적하고 있는 자들..

과메기 / 윤병주

과메기 윤병주 바다를 지나온 고단한 별이 흘러내린다 바다에 살았던 삶과 생이 마르기 전 겨울의 허전한 공복의 무게를 거칠게 매단 채 바다에 푸른 생을 두고 알몸으로 북서풍에 매달린 순례자 구름을 숭배한 어떤 이름으로 눈구름을 따라가면 그의 몸도 소금꽃이 될까 얼 수도 녹을 수도 없는 날을 마른 영혼이 건너가고 있다 차가운 겨울 해풍을 몇 번 맞아야 어떤 이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꽁치가 부캐로 과메기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한 때 온라인상에서는 인디언 이름 방식의 별칭이 자주 사용된 적 있었지요, 요즘은 평소 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의 나 또는 두 번째 캐릭터를 말하는 ‘부캐’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명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각 부문에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 ..

허공 / 이덕규

허공 이덕규 자라면서 기댈 곳이 허공밖에 없는 나무들은 믿는 구석이 오직 허공뿐인 나무들은 어느 한쪽으로 가만히 기운 나무들은 끝내 기운 쪽으로 쿵, 쓰러지고야 마는 나무들은 기억한다, 일생 기대 살던 당신의 그 든든한 어깨를 당신이 떠날까봐 조바심으로 오그라들던 그 뭉툭한 발가락을 나무의 허공이 더 커지는 순간 살면서 소위 ‘빽’이 없어 절망하고 삶을 내려놓았다는 소식을 가끔 듣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주장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은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빽’을 가지고 있어 권력이 된 자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이지요. 어쩌다 기댈 곳 하나 생겼는데 그마저 떠날 때 쿵 내려앉는 절망의 크기는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기댈 곳이 / 허공밖에 ..

겨울 숲의 은유 / 나호열

겨울 숲의 은유 나호열 살아남기 위하여 단 하나 남은 잎마저 떨구어 내는 나무들이 무섭다 저 혼신의 몸짓을 감싸는 차디찬 허공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큰 슬픔을 안아 들이는 눈물 없이는 봄을 기다릴 수 없다 살다보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떤 나무는 새 잎이 나올 때까지 잎을 달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무는 겨울이 올 때마다 모든 잎을 떨구고 온전히 벗은 몸으로 겨울을 이겨냅니다. 그것은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더 풍성하게 여름을 맞이하기 위한 처절한 삶의 몸부림인 것이지요. 혹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실연의 슬픔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허나 그보다도 가장 확실하게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 슬픔과 온전히 함께 하는 것이지요. 슬픔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것입니다...

늙은 꽃 / 문정희

늙은 꽃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하루살이에게는 허투루 사는 날마저도 평생입니다 하루를 평생으로 사는 하루살이에게는 허투루 사는 날마저도 평생입니다. 한 계절을 사는 풀들이 있고, 수십 수백 년을 사는 나무가 있습니다. 순간을 사는 꽃에 비하면 영원에 가깝지요.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어쩌면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피고 지는 일에 전 생애를 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루 일당을 벌기 위하여 구슬땀을 ..

그대여 / 문철수

그대여 문철수 1퍼센트의 가능을 삶이라 하고 100퍼센트의 불가능을 죽음이라 한다 하여 완벽한 죽음은 있어도 완벽한 삶은 없다 그러니 그대여 희망은 인위적인 것이고 절망은 자연적인 것이다 동토에 온기가 돌고 숨죽였던 것들, 메말랐던 것들 틈에서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그들을 비추고 생명 하나 없을 것 같던 대지가 어느새 활기를 되찾습니다. 언젠가 희망은 인위적인 것이고 절망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도리어 희망은 자연적인 것일까라는 어리석은 의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습니다. 그것은 뿌리 내릴 수 없을 것 같은 아스팔트 틈새에서 싹을 틔우는 풀꽃 하나 때문이고, 기운이 빠질 때마다 어디선가 기적 같은 생명의 소식들이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