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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쫄딱 / 이상국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6. 7. 10:55

쫄딱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경계란 열등감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한 때, 세상이 풍족해지며 다른 한 쪽에서는 야반도주라는 말이 유행처럼 자주 들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한적한 시골 어느 빈집은 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하여 분주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낡은 집에 온기가 돌고, 슬레이트 지붕 위로는 따스한 햇살이 앉고, 마당의 잡초는 뽑아져 나가고.....

시골 인구를 늘리기 위한 귀농귀촌정책과 노년의 여유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낙향하는 것이 아니니 화려함은 다 팽개쳐 두고 간단한 짐만을 챙겨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들 듯 갔을 것인데,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잔뜩 경계했던 사람들이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다는 계집아이의 한마디에 그만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맙니다.

경계란 열등감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빈손이 만만하게 보였을 것이고,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담벼락을 허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그래 너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하는 동질감을 선물한 것이지요. 거기서 내가 살아내기 위해선 결국 그들과 차이를 없애고 간극을 좁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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