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66

표4

표4 문철수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그까짓 게 뭐라고’는 시가 우리의 일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촌철살인의 감상평을 수록한 詩想錄이다. 1부 공광규의 ‘놀랜 강’, 이상국의 ‘쫄딱’, 문성해의 ‘취업일기’ 등 15편, 2부 이생진의 ‘벌레 먹은 나뭇잎’, 문정희의 ‘늙은 꽃’, 정희성의 ‘희망’ 등 19편, 3부 천양희의 ‘뒤편’, 정윤천의 ‘못’, 김승희의 ‘일회용 시대’ 등 14편, 4부 오규원의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이승하의 ‘치매’ 등 15편이 수록되어 시를 말로 씹는 맛을 살리고 있다. 문철수 시인은 여는 글에서 ‘시가 대중을 떠났다’고 엄중한 경고를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속에 용광로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시를 향한 열정이 매주 한 ..

꽃 문신 / 황영애

꽃 문신 황영애 딸아이는 세상에 없는 문신을 가지고 있다 찬란하고 슬펐다 우울한 비밀을 집안 살림도구에 털어놓았다 그들은 한꺼번에 눈물을 쏟았고 비밀이 아닌 날이 되었다 나는 세상의 없는 말로 눈부신 아픔을 대신하고 싶었다 비운을 개척한 영롱한 눈물이 몸에 무늬를 만들었다 애처롭도록 그윽했다 나는 매일 아이의 들숨으로 들어가 통증을 어루만졌다 꽃의 무게가 느껴졌다 메스가 지나간 길을 따라 꽃수를 놓을까 상처의 자국을 한 뜸 한 뜸 꽃의 환유로 뼈보다 단단한 마디를 새기듯 간절하게, 진정 간절하게 상처는 목숨보다 가볍지요 살면서 타인의 고통은 늘 내 고통보다 뒷전이고 작게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일순 지나는 일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짊어져야 하는, 추억으로 치환되지 않는 화석 ..

호박꽃이 꽃인 이유 / 최인숙

호박꽃이 꽃인 이유 최인숙 "내가 언제부터 예뻐진 줄 아니?" "몰라" "이름이 뭐야?" 하고 네가 물었을 때부터 침묵은 경멸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사람들은 대게 오해나 불신을 받을 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많은 말은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이 변명처럼 들리게 되면 오해나 불신은 확정 되고 증폭 되지요. 때로 오해나 불신은 침묵으로 견뎌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이겨낸다는 것은 보통 내공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침묵은 경멸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라고 자주 얘기하기도 하지만 상대를 두고 침묵으로 일관 한다면 그것은 필경 경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관심은 소통의 첫 번째 관문이기도 하고 상대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내가 언제부터 예..

개 같은 사랑 / 최광임

개 같은 사랑 최광임 대로를 가로지르던 수캐 덤프트럭 밑에 섰다 휘청 앞발 꺾였다 일어서서 맞은편 내 자동차 쪽 앞서 건넌 암캐를 향하고 있다, 급정거하며 경적 울리다 유리창 밖에 개의 눈과 마주쳤다 저런 눈빛의 사내라면 나를 통째로 걸어도 좋으리라 거리의 차들 줄줄 밀리며 빵빵거리는데 죄라고는 사랑한 일밖에 없는 눈빛, 필사적이다 폭우의 들녘 묵묵히 견뎌 선 야생화거나 급물살 위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 같은, 지금 네게 무서운 건 사랑인지 세상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간의 생을 더듬어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은 눈 단 한 번 어렴풋이 닮은 눈빛 하나 있었는데 그만 나쁜 여자가 되기로 했다 그 밤, 젖무덤 출렁출렁한 암캐의 젖을 물리며 개 같은 사내의 여자를 오래도록 꿈꾸었다. 저런 절절한 눈빛을 가진 ..

바람이고 싶다 / 전길중

바람이고 싶다 전길중 안개꽃에 둘러싸인 장미꽃 그 속에 잠든 바람이고 싶다 잠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더우나 추우나 떨림을 지니고 누군가에 안기고 싶은 바람이다 꾸밈없는 얼굴 투명한 마음 신선한 야성 잠시의 멈춤도 허용되지 않아 방향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이다 지치면 어느 숲에 머물러 아픔을 다독이는 바람이고 싶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부터 죽은 것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거듭 부정한다고 해서 모두 다 긍정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말로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잠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영원한 안식처라고 말은 하지만 그런 자들의 특징은 끝내 어디 한 곳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멈추..

간단하다 / 임강빈

간단하다 임강빈 검은 리본속사진 입언저리 파르르 떨며 무언가 말을 할듯말듯하다 땅을 파고 하관하고 마지막을 햇살이 덮어버린다 누군가 나직이 말한다 착한일 많이 했으니 좋은 곳으로 갔을거야 간단하다 일생이 너무나 간단하다 삶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잠 못 든 밤이 얼마였으며, 살아보겠다고 타인의 삶에 뱉은 침은 또 얼마겠으며, 알게 모르게 지나친 타인의 고통들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치열하다 못해 치졸하기도 했을 삶이 경계를 넘는 순간 남겨진 무수한 이야긴들 무슨 소용 있을까요. 돌아보면 별 것 아닌 일에 고봉의 의미를 쌓아가며 목청 높이지 않았을까요.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오해의 새끼를 꼬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지구 어느 모퉁이에..

치매 / 이승하

치매 이승하 ‘까꿍’이란 말을 내게 처음 가르쳐주신 어머니 “까꿍!” 하고는 웃으신다 나는 돌아서서 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버이날이 되니 온라인 세상에서는 온통 심순덕 시인의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라는 제목의 시가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중략)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 어머니를 본 후론.... // 아!..... //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로 끝을 맺는 이 시는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

어떤 바깥 / 엄원태

어떤 바깥 엄원태 들길 옆 얕은 구덩이에 누런 인조가죽 소파가 버려져 있다 가죽코트 차림의 술 취한 살찐 사내가 길가에 쓰러져 잠든 것 같았다 소파는 고집스럽게도 꼼짝 않고 엎드린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소파도 처음엔 들판의 밤바람이 춥고 새벽이슬에 몸 적시며 서러웠을 거다 뭣보다도 자신의 처지가 당황스러웠을 게다 평생을 실내에서만 지내온 소파에게 어느 저녁 트럭에 실려 도착한 난데없이 바람 센 들판 외진 공터란 얼마나 터무니없는 장소일 것인가 ‘이건 정말 말도 안 돼!’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파는 단단히 삐친 듯 몸을 더 웅크리며 돌아앉는 거였다 한 무더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회오리치듯 몸을 뒤틀다가 어스레해지는 공중으로 흩어지고, 개밥바라기가 검붉은 구름 지평선 너머 사라졌다 이제 또 밤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속삭이는 악마의 지배를 받는 시간 젊어서는 숨 쉬는 일과 잠자는 일이 제일 쉬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는 주변의 이야기와 여러 가지 이유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고달픈 삶 때문이기도 하겠고, 지병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아직도 귀만 대면 잠들..

시래깃국 / 양문규

시래깃국 양문규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

사람 / 박 찬

사람 박 찬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 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어떤 삶이 만만하고 부드럽던가요 솔굉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러지고 잘려나간 제 상처를 보듬기 위하여 굳어졌을 뿐인데요. 그럼에도 그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삶이 만만하고 부드럽던가요. 어떤 생이 온전히 따뜻하고 안온하던가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단 말인가요. 평생 폐지를 주워 모은 재산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하는 허리 굽은 노인이 어찌 상처가 없겠습니까. 어떤 이는 상처를 가슴에서 키우지만 그 노인은 필시 굳은 상처를 떼어내 삶의 절구에 곱게 빻아 바람에 날려 보냈을 ..

살아보니 / 김재진

살아보니 김재진 교양은 있어도 인정 없는 사람보다 투박하더라도 따뜻한 사람이 좋다. 눈길을 끄는 미모보다 평범해도 부드러운 얼굴이 좋다. 거침없는 달변보다 마음이 담긴 눌변이 좋으며 두드러지게 반짝거리는 사람보다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한 사람이 좋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보다 배우려는 사람이 좋으며 아는 척 나서는 사람보다 모르는 척 물러서는 사람이 좋다. 잘 팔리는 책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 책이 좋고 똑똑한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좋다. 내가 잘해 상 받는 것보다 자식이 잘해 칭찬받는 것이 좋으며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해도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이 좋다. 돈 많은 사람보다 돈을 귀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 좋으며 한때의 친구보다 무덤덤하게 오래가는 지인이 좋다. 남을 이기는 사람보다 나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빌려줄 몸 한 채 / 김선우

빌려줄 몸 한 채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스스로 겉잎 되어 자기 몸을 내어 주는 희생 중국 무협지에서는 상대의 목숨을 얻기 위해 내 팔 한 쪽 쯤은..

늑대의 눈물 / 김남권

늑대의 눈물 김남권 수컷 우두머리가 죽었다 암 늑대는 다른 무리의 늑대를 피해 가능한 멀리 떠나야 한다 하루 백 리가 넘는 숲을 가로질러 오스트리아를 지나 몽블랑까지 며칠 만에 천 킬로를 이동했다 큰수염수리가 따라오는 폭설 한가운데를 죽을힘을 다해 뛰어온 암 늑대는 따뜻한 은신처를 찾아 새끼를 낳았다 스라소니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도 늑대처럼 다섯 마리의 새끼가 작은 굴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을 포기하면 새끼들이 굶어야 한다 어미는 새끼들이 아, 하고 입 벌린 채 굶고 있을 때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알프스의 밤이 깊어 가고 늑대 새끼도 스라소니 새끼도 어미의 귀가를 기다리며 속절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암 늑대는 공중 깊숙한 곳의 달을 쳐다보며 숲의 정령을 포기한 채 마른 울음을 울어야 ..

틈에 관하여 / 고영민

틈에 관하여 고영민 책장의 책을 빼내 읽고 제자리에 다시 꽂으려고 하니 좀처럼 들어가지 않는다 빽빽한 책 사이, 있던 자리가 없어져버렸다 한쪽 모서리를 걸치고 열심히 디밀어도 제자리를 못찾는다 한 권의 틈을 주지 않는다 옆의 책을 조금 빼내 함께 밀어보니 가까스로 들어간다 내가 네 안에 반듯이 앉도록 조금만 그렇게 미궁을 들썩여다오 없던 틈으로 당겨져 내가 들어간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요 든 자리는 표시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표시 나는 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빼낸 누구라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그런 틈을 시간은 서서히 메워 갑니다. 그것이 잡히지도, 멈추지도, 담을 수도 없는 시간의 힘이라고들 하더군요. 하여 시간이 오래 지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