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있었다 거기에 있었다 / 나호열 -용장사지 3층 석탑 내가 걸어왔던 길을 가시덤불 헤치며 다가오는 사람아 이 절벽을 오르기 위해서는 한번은 푸른 하늘을 보아야 하리 공손히 허리를 굽혀야 하리 몇 번인가 무너져서 소리 없이 흩어지고 싶었으나 허공의 깊은 힘이 천 년을 떠받들고 앞으로도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3.05.26
산길을 돌다 산길을 돌다 / 나호열 삼릉 ↔ 포석정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가야 하는 것이네 삶과 죽음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를 많은 세월을 소모해야 하는 것처럼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그대 앞을 수 만 보를 터벅거리며 걸어야 하는 것 산길은 성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되네 흘러온 시간만큼 거대해..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30
동해를 바라보다 동해를 바라보다 / 나호열 사랑을 하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와르르 쏟아져 들어와서는 힘없이 모래나 밀고 돌아서는 그 말이 그렇고 자주 멀리 수평선을 보게 되는 그 마음이 그렇다 수평선 너머로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갈매기 몇 마리도 날려보고 보이지 않지만 가서 뜨..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29
감포 바다 감포 바다 / 나호열 사랑하지요 의문문으로 달려오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면서 내게 묻습니다 사랑하지요 발자국을 지우며 되돌아가는 파도에 대답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바다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저 혼자 소리칩니다 사랑하지요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28
초대 초대 / 나호열 사막에 가고 싶어요 아무도 살지 않는 그곳에 제 가슴이 있거든요 가슴 없는 몸은 마네킹 같아요 자꾸 허전한 손길이 낙엽을 짚어내네요 처음에는 붉은 물기 촉촉한 물기 사라지고 물기 따라 붉음 사라지고 만지면 폭삭 바스러지는 모래 부스러기 같이 가실래요? 그 막막한..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25
눈물 눈물 / 나호열 예쁜 꽃들 사이에 예쁘지 않은 눈물은 향기가 없으나 향기 속에 눈물을 가득 담은 나무 아래서 하루 종일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24
가을 호수 / 나호열 가을 호수 / 나호열 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깊어 나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없습니다 길이 없어 흰 구름만이 철새처럼 발자국을 남기고 눈도 씻고 가는 곳 당신의 얼굴 가득히 담아 바람은 가끔 물결을 일렁이게 하지만 당신이 놓아준 작..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22
구름 위 궁전 구름 위 궁전 / 나호열 주춧돌도 없이 기둥도 없이 산 위에 궁전이 세워진다 푸른 하늘로 지붕을 덮은 누옥 한 채가 방 하나 부엌 하나 그것만으로도 화려하다고 꿈꾸는 동안 와르르 소리도 없이 무너지는 무너지며 흘리는 눈물 때문에 산은 초록빛 소름을 두른다 너를 만난 처음 그 날처..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20
정적과 놀다 정적과 놀다 / 나호열 뒤축이 닳은 고단한 신발 벗어놓고 정적을 건넌다 내력을 모르는 난초 한 뼘 박토에 발목 묻고 한 송이씩 꽃봉오리를 떨군다 향기가 없는 꽃은 천천히 아름다워져 이윽고 후일을 믿지 않는다 불임의 화분처럼 너덜해진 신발처럼 정적은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러 있..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9
면벽面壁 면벽面壁 / 나호열 돌아 왔습니다 침묵 앞으로 적막 속으로 나지막히 인사 합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얼굴 씻고 흐린 세상 바라본 눈도 꺼내어 씻고 무심코 만졌던 탐욕 두 손을 마지막으로 씻었습니다 침묵 앞에 무릎 꿇습니다 적막 속의 길로 들어섭니다 돌아 왔습니다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8
두메 양귀비꽃 두메 양귀비꽃 / 나호열 당신에게 가는 먼 길 맞부딪쳐오는 바람에 눈 감아버리는 밤길 수 백 리를 걸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어 흙탕물 한 방울도 소중히 하루를 산다는 어느 먼 나라의 검은 여인들의 맨발로 매일 지도에도 없는 순례의 길을 다녀온다 노란 날개 팔락거리는 나비 작..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7
달팽이의 꿈 달팽이의 꿈 / 나호열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내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 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5
자작 나무 한 그루 자작 나무 한 그루 / 나호열 자작나무 한 그루 내게로 왔다 허공에 매달린 채 발목을 자꾸 내게로 밀어 넣으며 아직도 얼음 아삭거리는 하늘과 예쁜 몇 마리 새도 데리고 왔다 마흔 몇 해를 살았다고 돌보다 단단한 어둠의 나이테를 속살까지 보여준다 지금 나는 이야기 책 한 권 분량의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4
아카시아와의 대화 아카시아와의 대화 / 나호열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 향긋한 꽃, 달콤한 꿀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한 번 뿌리 내리면 땅심 다 빨아들여 누구에게도 길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무성한 소문처럼 하얀 꽃 너울대면 저 산에 들에 가득하였습니다. 그가 미워서 무성해진 마음이 싫어서 베고 또 베..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2
모래 강 모래 강 / 나호열 몇 년에 한 번 아니 일생에 한 번 큰물이 져야 일어서는 강이 있다 바다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흐르다 모래 속으로 스며들고 마는 몇 년에 한 번 아니 일생에 한 번 큰 울음 일으켜 세우다 사라져버린 페가서스처럼,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