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59

존재와 인식의 먼 길

존재와 인식의 먼 길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나호열 시집 / 정한용(시인 . 평론가) 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친숙하며 낯익은 용어 중 하나는 ''서정성''이다. 어찌보면 이젠 낡아빠져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줄 것 같지 않은 이 용어가, 그러나 지금도 많은 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적절한 말이며, 동시에 그럴수록 잘못 이용되는 경우도 흔하다. 객관을 자아화시키되 자아에 의해 굴곡되지 않고, 단지 투영만 할 수 있는 정확한 인식체계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대상의 중간지점 어디쯤에서 우리는 늘 머물게 마련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나호열의 시를 이야기하면서도 그런 부담감을 지울 수 없다. 사물은 본질과 언어상징이라는 두개의 축 사이에서 변증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조명기구 가게에서 1

조명기구 가게에서 1 아직 영혼이 깃들지 않은 아기의 얼굴 전구들은 반짝인다 작으면 작은대로 서로 어울리고 큰 것들은 저 홀로 당당히 뽐내기도 하면서 아직 이어지지 않은 전선 끝에 아득히 아득히 내가 서 있다 잠재된 필라멘트의 혈관 속으로 뜨겁게 흘러드는 나의 목숨 궁휼한 하나님의 뜻대로 흔들리는 뭇별과도 같이 누구인가 스위치를 내리고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이는

어떤 하루 3

어떤 하루 3 잡풀처럼 꺾이지 않고 흥망에 노여워하지 않고 다만 무너져내리고 있는 비석 하나 생각에 겨워 비스듬하여라 잊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모하며 시치한가 또 얼마나 적막한가 한 자리에 오래 스스로 이름 지우며 그런 생각을 했을까 무심코 지나치는 길손의 뒤를 모퉁이 돌 때까지 전송하는 당신은 누구신가 안녕하신가

어떤 하루 2

어떤 하루 2 그들은 돌아왔다 한자리에 모여 비밀결사처럼 술잔을 나누기 위해 놀라운 변신술로 서로를 알아보며 이스트에 부풀려진 대화를 나눈다 아무도 모르게 거울에 비춰지는 이상한 동작들 저고리에서 비수 대신 자들을 꺼내어 말없는, 평화의 피를 흘린다 모여지지 않는 합창은 비명처럼 흩어지고 깊어가는 겨울에 제 맛을 내는 소나무여 너는 어디에서 키를 세우고 있느냐 분해의 역순으로짚어낼 수 없는 시간의 저만큼에서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죽어 있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 바람만이 그들의 이름을 길게 호명하며 용이 되어 날아 올랐다

어떤 하루 1

어떤 하루 1 한낮은 고단하였다 가도가도 너른 풀밭은 보이지 않았고 멍에는 무거웠다 끝내 풀 수 없었던 밧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얽혀져 있었다 쇠방울을 울리며 외양간으로 돌아오는 발굽 아래로 저녁은 부끄러웠다 진통제가 풀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피로가 섞인 꿈은 더욱 병들어 갔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인가 알기 위하여 더 많은 꿈들이 필요하였고 더 많은 현실이 차용되었다 마지막에 꾼 꿈은 푸른 하늘 비스듬히 내려 앉은 언덕에 더욱 비스듬히 앉은 나의 모습 누군가 그 풍경을 액자에 담아 갔는데 아직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강가에서

강가에서 아득한 강 저편 바라보면 건널 수 없어 나는 좋아라 두터운 침묵의 옷을 입은 미루나무 흔들리듯 꿈꾸기도 황홀하여라 강나루 너머로 한 사람이 지나간 길이 끝나고 눈빛으로 뛰어넘어 유리창 같은 봄날을 깨뜨리면 전기침을 하며 일어서는 강둑에 서서 건널 수 없는 저편 가보지 못한 한 마음을 꿈꾸는 일과 노을과 함께 독백을 지우는 일은 기쁨이어라

다시 오월에

다시 오월에 돌아오마 이루지 못한 꿈 너희들과 함께 나누마 약속은 없었어도 우리에겐 약속의 상처가 남아 까닭없이 눈물나는 오월 작은 숨소리 들리더니 함성이 몰려 오더니 포성이 울부짖더니 금시라도 컴컴하게 무너져내릴 듯 세상은 몸시도 흔들리더니 깨진 유리창 사이로 우윳빛 흰피톨 한 줄기 평화의 빛이 나타난다 사나운 발자국 뛰쳐나간 길 비켜서서 너는 누구냐 붉은 장미꽃

바람 부는 날 2

바람부는 날 2 바람이 몹시 센 날에는 그저 바람을 바람으로 마주할 수 밖엔 없다 사금파리로 부서져내린 별빛을 밟으며 온밤을 헤매인다 해도 그저 바람을 바람으로 마주할 수밖엔 넋두리와 한숨을 버무려 힘을 뺄 수밖엔 없다 나야, 나야 외치며 불러본들 누구도 나 대신 대답할 수없다 바람이 몹시 센 날에는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기울어진 세계를 기울어진 채로 걸어가는 비어 있는 초상화가 걸려 있다

길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 다음에는 두 사람이 다음 다음에는 여러 사람이 그 길을 갔다 머뭇거리며 가던 처음 사람이 닿고 그 다음 사람이 덜 두렵게 닿고 다음 다음 사람들이 그 다음에 아무렇지 않게 닿고 이윽고 길은 길다워져 세상 사는 일들이 하나로 통한다 가서는 오지 않는 사람 아직도 이곳에서 망설이는 사람 사이를 천만 년 잇고 잊는 이상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