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안녕, 베이비박스 2019 76

안녕, 베이비 박스

안녕, 베이비 박스 안녕 이제 떠나려 해 혹한과 눈폭풍 속에서도 서로의 황제가 되었던 짧은 며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부화를 꿈꾸는 돌을 닮은 생명 난 뒤돌아보지 않아 이제 저 푸르고 깊은 바다로 갈꺼야 나의 몸부림이 멋진 자맥질이라고 오해하지는 마 봄이 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뒤돌아보지 않으려 해 너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해 부디 짧은 추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 너무 느리게 걸어가고 있을 뿐 나의 베이비 박스 안녕

준에 대한 오해

준에 대한 오해 주운 하고 부르면 유월이 푸른 보리밭을 데리고 오고 준 하고 다시 부르면 단풍잎을 닮아가는 어느 시인이 닉네임을 들어 보이고 세치 혀를 잘못 굴리면 제인으로 잘못 알아들은 귀가 어두운 타잔의 애인은 밀림 속에서 황급히 옷을 찾는 중 제인을 죄인으로 잘못 알아들은 내가 지레 고개 숙이고 지나가는 가을은 덩달아 깊어지고

페넬로페 카페

페넬로페 카페 수천 타래의 바람으로 지어놓은 옷은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몸 꽃 한 송이 피려면 만 리 밖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불이 닿아야 하는 것 모르는 척 기다렸던 실마리를 당기자 바람은 몸을 허물고 살을 버린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추는 황홀 이제야 꽃봉오리 조금씩 열릴 때 화염의 그림자가 하늘 높이 오르가즘의 새들이 되어 날아오르는 페넬로페의 밤

메리

메리 메리라고 부르면 저 태평양 건너 미국하고도 시골 아이오와에 사는 촌뜨기 주근깨 소녀가 달려올 것 같다 메리가 아니라 메어리야 친절하고 자상한 영어 선생님이 메어리라고 부를 때 나는 메아리가 생각나고 왜 미아리가 생각났을까 메어리 메아리 메리 아무렇게 불러도 묶이기 싫어하고 아무 데나 똥을 싸는 양치기 후손이라는 흰 털을 가진 강아지가 쪼르르 달려 나온다 아이오와의 드넓은 농장에서 양 떼를 모는 메리의 꿈 피 속에서 부화되지 않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미아리 고개를 넘지 못했나 보다

I - It

I - It 오늘도 그가 왔다 굳은 표정과 열쇠가 없는 침묵으로 말을 거는 그에게 오히려 나는 할 말이 없다 낯이 익은 탓인지 온갖 비밀로 가득 찼던 몸을 기꺼이 내게 열어 주지만 그는 언제나 나에게는 삼인칭의 이름 찬란했던 봄이 가고 딱딱한 눈물이 남는 나무처럼 부드러운 나의 손길에도 깊은 나이테를 보여주지 않는다 잘 가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터이니 나는 다시 또 다른 그를 기다릴 뿐 슬퍼할 겨를이 없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 장의葬儀의 나날들

가난한 연보年譜

가난한 연보年譜 힘들게 써 내려간 이력이 바람에 지워진다 지워지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길 넌지시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을 애써 감추는 길 언제인가 그 길은 멈추어 서겠지만 아마도 이 궁휼한 우주의 어느 모서리에도 닿지 못하고 부끄럽게 가슴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손이 될 것만 같아 죄 없이 시들어가는 가문 꽃밭에 눈길을 주다 보니 한 생이 깊었다 내가 불러보는 나의 이름 이렇게 낯설다

손 손이 그리워져 본 적이 있는가 휘청, 몸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 할 때 내가 그토록 믿었던 다리도 소용이 없고 허공을 쓴웃음으로 붙잡으려 할 때 내게 간절한 것은 또 하나의 손이다 어디에선가 불쑥 아무도 모르게 돋아 오르는 여린 싹처럼 저도 어쩔 줄 모르면서 어쩌자고 내게 내미는 손 그러나 처음 나를 잡아준 것은 방바닥이나 벽처럼 무정한 것들 기억하지 않으려고 도리질한들 상처는 쓰담을 수 없어 슬며시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던 마음을 만나는 날 넘어지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날 날카로운 송곳이라 해도 온기가 스며있다면 내게는 그리운 손이다

등 겨울이 되어야 가난을 뉘우친다 일 년 내내 보이지 않던 틈새로 황소바람이 칼춤을 추고 목화밭 하나로 덮인 이불도 숨이 죽어 앓는 소리를 내는 밤 초승달 녹슨 낫처럼 몸을 휘니 의붓자식처럼 홀대하던 등이 바람막이 되어 흔들린다 차라리 온기 사라진 방바닥에 등을 내려놓자 그때 등은 온기를 내뿜어 방바닥을 덥혀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돌아보아도 뒤 그늘인 등은 무엇이든 닿으면 온 마음으로 말을 거는 등은 끝끝내 그리움의 저 편에 서서 꺼지지 않는 등燈인 것이다

드라마에 빠지다

드라마에 빠지다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그래도 기다린다 마지막은 언제나 해피앤딩 끝내 악인이 몰락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졸이고 불끈 두 주먹을 허공에 내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 그 거짓이 내가 바라는 열망 소실점 밖으로 주인공이 사라져 갈 때 행복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또 다른 복선의 우연의 우연으로 얽혀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가련한 사내를 기다리면서 주머니를 뒤집고 또 뒤집어본다 지금 꿈꾸고 있나?

산 의자

산 의자 아무 데나 주저앉지 말라고 털썩 주저앉은 자리에 힘들게 영글은 씨앗이 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니면 어느 여린 짐승이 짝을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발자국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 정상을 향하는 다리 힘이 남아 있으면 눈길 주지 말고 지나치기를 그래도 느리게 가고 싶고 말 통하지 않는 나무들과 잠시라도 눈 맞추고 싶으면 등돌려 이름이라도 물어보라고 그렇게 산등성이 타고 올라와 혼자 서 있다 의자라는 이름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던 우리의 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