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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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마음으로 사진 읽기 53

[53] 땅에 귀를 기울이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3] 땅에 귀를 기울이면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3.03. 03:00  벼락같이 봄이 왔다. 텅 빈 하늘에 온기가 번지고, 물 올림을 갈망하는 나뭇가지에도 초록이 비친다. 꽃샘추위가 남았지만, 이제 어깨를 펴야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순환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를 만들고 있다.정주하(1958~ ) 작가는 작품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 지역에 있는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처음 가지게 된 농촌과 농부, 농사일에 대한 관심은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그를 온전히 그곳 사람으로 만들었다. 1200평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도 하고, 환경운동도 앞장서는 그의 작가적 관심과 일상의 ..

[52] 풍경을 들이는 문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2] 풍경을 들이는 문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2.24. 03:00업데이트 2023.02.24. 18:34 이동춘, 도산서원의 문, 2009. 벽은 제한하고 문은 확장한다. 벽과 문은 하나다. 벽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짓고 문으로 드나드니, 사람이 만든 집이 사람의 발길과 눈길을 인도한다. 어떤 벽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철벽처럼 차갑고, 어떤 담은 슬쩍 뛰어넘어도 될 것처럼 다정하다. 어떤 문은 늘 열려 있어서 평화롭고, 또 어떤 문은 벽보다 꽉 막혀서 남의 세상이다. 벽과 문으로 구획된 공간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동춘(63) 작가는 젊은 시절 생활 문화 전문지 사진기자로 일을 시작해서 전통적 또는 한국적이라 할 만한 소재..

[51] 사진을 부르는 풍경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1] 사진을 부르는 풍경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2.10. 03:00 조웅희, 태평염전, 2022. 인간은 순응한다. 천재지변에 순응하고, 환경에 순응하고, 주어지는 것들에 순응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있고 그냥 받아들일 순 없는 것도 있으니 때론 거스르거나 극복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힘이 닿지 않거나 애를 써도 달라지지 않는 일엔 결국 순응만이 길이다. 받아들이고 따르거나 뒤집어엎고 뛰쳐나가야 할 시간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생사와 존폐를 가른다.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생존한 종(種)으로서 인간은 적응의 방책인 순응의 미덕을 영리하게 써온 것이다. 자연을 품은 풍경 앞에서 저절로 숙연해지거나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있다. 해가 지고 ..

[5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2.03. 03:00 작가 미상, 빨래하는 여인들, 한강, 1948. 연일 난방비 상승 뉴스를 듣는다. 최근 온 국민이 체감하는 물가 인상 사례 중에 가장 파괴력이 크지 않은가 싶다. 뉴스가 학습을 시켜주니 관리비 고지서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전기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불쑥 감사함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시각예술전문 출판사 눈빛은 인사동에 전시 공간을 열고 무명씨의 사진을 걸었다. 전시 제목은 박완서의 소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같다. 소설은 6·25 전쟁 이후의 비극을 다루었지만, 전시된 컬렉션은 전쟁 이전의 서울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

[49] 미디어와 친구로 잘 지내기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9] 미디어와 친구로 잘 지내기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27. 03:00 김진희, Finger Play-057, 2019. 친구를 사귀는 일은 중요하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곧 내 삶에 대한 무수한 평가 지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어른이 친구 사귀기는 만만치 않은 과제다. 제일 우선시해서 최선을 다하기도 어렵고 애를 쓴다 해도 잘 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도 있다. 퇴근길에 친구를 만날까, 혼자 OTT 영화나 볼까, 잠시 저울질하다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이 맺어주는 관계는 종종 친구나 가족보다 심리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쯤 되면 스마트폰을 반려 로봇으로 발전시켜서 그냥 친구 삼으면 ..

[48] 빛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8] 빛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 신수진 한국외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20. 03:00 이정록, NABI / 산티아고 01, 2019. 인간이 사는 동안 품고 가는 질문의 핵심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일 것이다.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사명을 가지고 살다 죽음 뒤엔 어떻게 될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는 게 산 자의 숙명이다. 강아지가 아무리 좋은 친구라 해도 그 삶을 길에 비유하진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생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인 것이다. 이정록(1971~ )은 성스러운 장소의 특질을 탐구한다. 그것은 지형이거나 공기의 밀도일 수도 있고, 에너지이거나 그냥 느낌일 수도 있다. 작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오랜 시간 인간에게 신성성..

[47] 눈 내린 새벽의 종묘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7] 눈 내린 새벽의 종묘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06. 03:00 서헌강, 종묘 정전 겨울18412, 2008. 눈 내린 새벽엔 뭘 하면 좋을까. 따뜻한 담요를 뒤집어쓰고 창밖으로 눈 구경을 해도 좋겠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셔도 좋겠고, 아이처럼 집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어도 좋겠다. 여기까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어떤 사람은 종묘로 가서 사진을 찍는다. 물론 그러려면 많은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새벽도 눈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특히 도심의 눈은 빨리 녹기 때문에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눈이 오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눈밭의 표면이 흐트러지기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한다.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 새벽에 출입..

[46]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6]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2.30. 03:00 강운구, 조세희, 경기 가평, 1993. “사람들 얼굴 위로 빛과 그늘이 부단히 교차한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강운구) 사람과 때가 만나 시절의 운이 생긴다. 때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하고 떠나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때에 따라 모임과 흩어짐이 달라진다. 나의 때와 누군가의 때가 엮이고 섞이면서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렇게 사람도 흘러간다. 강운구(1941~ )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자존심이다. 꼿꼿하고 빈틈없는 성품에 두꺼운 애호가층과 열렬한 추종자들을 거느린 사진계의 ‘선생님’이다. 그의 ..

[45] 시간의 반짝임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5] 시간의 반짝임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2.23. 03:00 안준, Gravity 010, 2014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고 내린 눈이 녹지 않아 곳곳에 설경이 아름답다. 이런저런 불편함도 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니 그래도 뭐 나쁘지 않지 싶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엔 유난히 따뜻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인기다. 해가 기우는 추운 겨울엔 우리에게 유난히 더 온기와 사랑과 기적이 필요한 것일 게다. 놀라운 일들은 현실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잉태되어서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지 않는 인간의 고뇌와 열망을 먹고 성장하여, 결국 어느 날의 세상을 반짝이게 만든다. 안준 작가의 ‘원 라이프(One Life)’ 연작 중 ‘그래비티(..

[44] 잎이 지면 보이는 것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4] 잎이 지면 보이는 것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2.09. 03:00 김성수, tree_study 5, 2008. 아주 천천히 가을이 지나갔다. 긴 가을날들 동안 나무는 초록을 단풍으로 바꾸었고 이내 낙엽을 내렸다. 올해엔 유난히 오래 가을을 누렸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눈이 오는 차가운 길을 지키고 선 앙상한 가로수는 햇살이 비쳐도 쓸쓸해 보인다. 다음 봄이면 다시 물이 올라 생기 넘치는 잎을 틔울 날이 올 줄 알지만, 초겨울의 스산함은 눈에서 마음으로 찬 기운을 퍼뜨린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감정이입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사계절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새로운..

[43] 마음 챙김의 예술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3] 마음 챙김의 예술 신수진 한국외대 초빙교수 입력 2022.12.02. 03:00 장태원, Remains003, 2014. 에너지원을 공급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듯이 마음에도 규칙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 마음을 건강하게 하려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태도가 유행을 넘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함께 겪은 팬데믹이나 경기 침체, 줄을 잇는 사건 사고 등의 영향인지 어느새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나 보다. 2018년 이후에 출시된 명상 애플리케이션만도 2000개가 넘는다고 하니, 바야흐로 마음 챙김의 시대이다. 유독 수양하듯이 완성되는 작품들이 있다. 장태원의 ‘리메인즈(Remains)’ 연작도 그렇다. 제목이 말하는 ‘남은 것들..

[42] 소주 한잔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2] 소주 한잔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1.25. 03:00 최광호, 술과 안주, 1998. 예술은 타인을 탐색할 수 있게 해 준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행동과 사고와 감정을 아주 내밀하게 들여다볼 기회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든 작품에는 분명한 공통 목표가 있다. 작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자연히 작품을 만나면 그 안에 어렴풋이 사람이 보인다. 작품을 살펴보는 데에 규칙이나 매뉴얼은 없다. 작가의 면전에 대고 하는 말이 아니라면 극찬이든 혹평이든 순전히 보는 사람 맘이다. 작품은 발표되는 순간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감상자와 교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을..

[41] 새벽을 부르는 발걸음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1] 새벽을 부르는 발걸음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1.11. 03:00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밤은 곧 불빛이다. 고층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찬 도시는 밤이 오면 빛으로 어두운 곳을 지워가며 낮과는 다른 위용을 드러낸다. 도시의 밤하늘은 낮보다 어둡지만, 도시인이 머무는 곳엔 인공의 빛이 있다. 가로등부터 위로 위로 층층이 쌓인 불빛은 도시마다 특유의 지형을 만든다. 매일 해가 어스름하게 사라지기 시작하면 도시는 빛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박부곤, Tracking 20.1, 2013 박부곤 작가는 ‘트래킹(Tracking)’ 연작(2013-2014)에서 밤과 도시, 인간과 빛의 관계를 관통하는 의미를 탐구하였다. 사진 속 멀리 보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40] 깊은 슬픔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0] 깊은 슬픔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1.04. 03:00업데이트 2022.11.04. 13:29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해서 두려워하지도 못한 일, 상상도 못 한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충격으로 시야는 흐리고 마음은 잿빛이다. 대책을 세우고 논평을 내고 문제를 지적하고 책임을 추궁한다. 애도는 이 모든 소음을 빨아들이는 깊은 슬픔이다. 우리는 지금 그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형순, 드로잉 004, 2022 진실은 쉽사리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생생하게 그 장면을 보여주었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는다. 분절된 시간과 공간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가며 복기하고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며 ..

[39] 여행의 필수 요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0.28. 03:00 오래 잘 참았다 싶을 만큼 긴 시간을 여행 없이 보냈다. 올가을 지난 3년간 불황기를 겪은 여행 업계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는 기사들이 반갑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뉴스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설렌다. 여행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느 만큼 멀리 가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가느냐, 어디로 무슨 목적으로 누구와 가느냐 등등이 집을 떠나는 시간을 규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모든 떠남은 용기이며 도전이다. 김종철, 스위스, 2006. 직업상 많은 분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볼 기회가 많다. 다큐멘터리나 저널리즘 사진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한동안 유행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