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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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진 마음으로 사진 읽기 60

[60] 어둠을 입고 빛나는 집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60] 어둠을 입고 빛나는 집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5.05. 03:00 어릴 적 살던 집. 오래되어서 흐릿해진 장면들이 어슴푸레 끌어올리는 기억은 마음까지 말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이 반짝반짝 빛나기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매끈하게 정리된 앨범처럼, 깔끔하게 단장한 소셜미디어처럼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말이다. 남들은 모르는, 내밀한 기억 속에 오랜 집도 대부분 그렇게 명과 암이 교차하는 모습일 것이다.회화와 사진을 전공한 손은영 작가는 ‘밤의 집 I(2020)’ 연작에서 초라한 집들을 주인공 삼아 낯선 당당함을 제시했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도시의 밤 골목을 헤매다니며 사진을..

[59] 가장 표준적인 회색의 하늘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9] 가장 표준적인 회색의 하늘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4.28. 03:00  인간의 순응은 의식하거나 결심하지 않아도 시작되는 감각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생존에 필요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기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땀구멍을 닫아서 체온을 유지하는 것처럼 감각 작용을 통한 순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에서 불수의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자동화된 기계처럼 반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후에라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각하기 어렵다.KDK(김도균, 1973~ ) 작가는 ‘g’ 연작(2015~2020)에서 우리 눈의 순응 과정을 역설적으로 자각시킨다. 연작에 포함된 3..

[58]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것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8]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것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4.21. 03:00  인간의 눈은 그리 성능이 좋지 않다. 멀리, 선명하게, 세밀하게, 빨리 보기 중에 딱히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능력이 하나도 없다. 기계로 치자면 참 별로인 셈이다. 동물 중엔 생존에 유리하도록 특별한 시각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타조는 십리 밖 물체의 움직임을 볼 수 있고, 매는 색 감지력이 월등하며, 고양이는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세상을 본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생존력이 낫다면 그것은 시력 때문이 아니라 눈으로 수집되는 정보를 복잡다단하게 활용할 줄 아는 뇌의 사고력 덕분이다.이고은, Campbell's Tomato Soup, 2023. 이고은 작가..

[57] 돌이 날아다니면? 멋있지 뭐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7] 돌이 날아다니면? 멋있지 뭐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4.07. 03:00   뭐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배웠다. 성실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시대의 부모님과 선생님들 덕에 무겁고 진지한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변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인내하고 연단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가벼움의 시대’에 살면서 이렇게 옛날 사람이 되어가나 싶다가도, 나도 모르게 가벼움에 매료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유현미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조각과 회화, 사진의 방법을 순차적으로 이용한다. 우선 오브제를 조각해서 원하는 형태를 만들고 작업실의 한구석에 그 조각들을 설치하고 사진에 찍힐 모든 표면에 칠을 한다...

[56] 그를 따라 초록 숲으로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6] 그를 따라 초록 숲으로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3.31. 03:00김옥선, Kevin the Humanist, 2007 무인도에 가게 되면 뭘 가져가고 싶은지 묻는 게임이 있었다. 고등학교 수련회에서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해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섬의 생태 환경을 상상하고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꼽아보고 우선순위를 정하려 했으니 머릿속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가상의 스토리이지만 생존 게임에 과몰입한 나머지 어떻게든 조난을 피해야겠다는 엉뚱한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 비슷한 게임을 몇 번 해보고 나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로빈슨 크루소 같은 사람 한 ..

[55] 그래, 배를 저어야지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5] 그래, 배를 저어야지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3.24. 03:00   복수극, ‘더 글로리’가 인기다. 학창시절 처참하게 짓밟힌 주인공이 복수에 자신을 헌신해서 영광과 명예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그렸다. 삶은 때로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이어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을 준다.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게 누구라도 불운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내 가족에게는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위기는 공포를 유발한다. 사람을 잡는 것도 살리는 것도 위기 자체가 아니라 공포를 느끼는 마음이다. 극단적인 공포심은 사람을 바꾼다. 정윤순 작가는 몇 해 전 큰 사고로 반 년간..

[54] 꽃이 아름다운 만 가지 이유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4] 꽃이 아름다운 만 가지 이유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3.10. 03:00 꽃을 기다린다. 저 멀리서 들리는 꽃 소식 말고, 마른 가지를 거짓말처럼 뒤덮어서 어느 날 문득 마음을 콩콩 두드리며 눈부신 아침을 만들어 줄 꽃을 기다린다. 곧 지고 말 잠깐의 찬란한 시간을 기다린다. 초록보다 오래지 않아서 더 애틋할 설렘을 기다린다. 꽃이 아니라면 무엇이 시절을 그토록 빛나게 할 수 있을까. 구성수(1970~)는 ‘포토제닉 드로잉(Photogenic drawing)’ 연작에서 꽃을 소재로 삼아서, 성실하면서도 다재다능한 작가적 면모를 유감 없이 드러냈다. 사진이 지닌 매체적 특성과 쉼 없이 변모하는 생명력에 대한 탐구가 이 작업을 가능하게 했..

[53] 땅에 귀를 기울이면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3] 땅에 귀를 기울이면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3.03. 03:00  벼락같이 봄이 왔다. 텅 빈 하늘에 온기가 번지고, 물 올림을 갈망하는 나뭇가지에도 초록이 비친다. 꽃샘추위가 남았지만, 이제 어깨를 펴야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의 순환이 거스를 수 없는 변화를 만들고 있다.정주하(1958~ ) 작가는 작품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 지역에 있는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처음 가지게 된 농촌과 농부, 농사일에 대한 관심은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그를 온전히 그곳 사람으로 만들었다. 1200평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도 하고, 환경운동도 앞장서는 그의 작가적 관심과 일상의 ..

[52] 풍경을 들이는 문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2] 풍경을 들이는 문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2.24. 03:00업데이트 2023.02.24. 18:34 이동춘, 도산서원의 문, 2009. 벽은 제한하고 문은 확장한다. 벽과 문은 하나다. 벽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짓고 문으로 드나드니, 사람이 만든 집이 사람의 발길과 눈길을 인도한다. 어떤 벽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철벽처럼 차갑고, 어떤 담은 슬쩍 뛰어넘어도 될 것처럼 다정하다. 어떤 문은 늘 열려 있어서 평화롭고, 또 어떤 문은 벽보다 꽉 막혀서 남의 세상이다. 벽과 문으로 구획된 공간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동춘(63) 작가는 젊은 시절 생활 문화 전문지 사진기자로 일을 시작해서 전통적 또는 한국적이라 할 만한 소재..

[51] 사진을 부르는 풍경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1] 사진을 부르는 풍경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2.10. 03:00 조웅희, 태평염전, 2022. 인간은 순응한다. 천재지변에 순응하고, 환경에 순응하고, 주어지는 것들에 순응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있고 그냥 받아들일 순 없는 것도 있으니 때론 거스르거나 극복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힘이 닿지 않거나 애를 써도 달라지지 않는 일엔 결국 순응만이 길이다. 받아들이고 따르거나 뒤집어엎고 뛰쳐나가야 할 시간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생사와 존폐를 가른다.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생존한 종(種)으로서 인간은 적응의 방책인 순응의 미덕을 영리하게 써온 것이다. 자연을 품은 풍경 앞에서 저절로 숙연해지거나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있다. 해가 지고 ..

[5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0]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2.03. 03:00 작가 미상, 빨래하는 여인들, 한강, 1948. 연일 난방비 상승 뉴스를 듣는다. 최근 온 국민이 체감하는 물가 인상 사례 중에 가장 파괴력이 크지 않은가 싶다. 뉴스가 학습을 시켜주니 관리비 고지서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전기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불쑥 감사함과 두려움이 교차한다. 시각예술전문 출판사 눈빛은 인사동에 전시 공간을 열고 무명씨의 사진을 걸었다. 전시 제목은 박완서의 소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같다. 소설은 6·25 전쟁 이후의 비극을 다루었지만, 전시된 컬렉션은 전쟁 이전의 서울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

[49] 미디어와 친구로 잘 지내기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9] 미디어와 친구로 잘 지내기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27. 03:00 김진희, Finger Play-057, 2019. 친구를 사귀는 일은 중요하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곧 내 삶에 대한 무수한 평가 지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어른이 친구 사귀기는 만만치 않은 과제다. 제일 우선시해서 최선을 다하기도 어렵고 애를 쓴다 해도 잘 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도 있다. 퇴근길에 친구를 만날까, 혼자 OTT 영화나 볼까, 잠시 저울질하다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이 맺어주는 관계는 종종 친구나 가족보다 심리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쯤 되면 스마트폰을 반려 로봇으로 발전시켜서 그냥 친구 삼으면 ..

[48] 빛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8] 빛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 신수진 한국외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20. 03:00 이정록, NABI / 산티아고 01, 2019. 인간이 사는 동안 품고 가는 질문의 핵심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일 것이다.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사명을 가지고 살다 죽음 뒤엔 어떻게 될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는 게 산 자의 숙명이다. 강아지가 아무리 좋은 친구라 해도 그 삶을 길에 비유하진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생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인 것이다. 이정록(1971~ )은 성스러운 장소의 특질을 탐구한다. 그것은 지형이거나 공기의 밀도일 수도 있고, 에너지이거나 그냥 느낌일 수도 있다. 작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오랜 시간 인간에게 신성성..

[47] 눈 내린 새벽의 종묘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7] 눈 내린 새벽의 종묘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06. 03:00 서헌강, 종묘 정전 겨울18412, 2008. 눈 내린 새벽엔 뭘 하면 좋을까. 따뜻한 담요를 뒤집어쓰고 창밖으로 눈 구경을 해도 좋겠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셔도 좋겠고, 아이처럼 집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어도 좋겠다. 여기까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어떤 사람은 종묘로 가서 사진을 찍는다. 물론 그러려면 많은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새벽도 눈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특히 도심의 눈은 빨리 녹기 때문에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눈이 오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눈밭의 표면이 흐트러지기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한다.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 새벽에 출입..

[46]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6]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2.12.30. 03:00 강운구, 조세희, 경기 가평, 1993. “사람들 얼굴 위로 빛과 그늘이 부단히 교차한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강운구) 사람과 때가 만나 시절의 운이 생긴다. 때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하고 떠나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때에 따라 모임과 흩어짐이 달라진다. 나의 때와 누군가의 때가 엮이고 섞이면서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렇게 사람도 흘러간다. 강운구(1941~ )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자존심이다. 꼿꼿하고 빈틈없는 성품에 두꺼운 애호가층과 열렬한 추종자들을 거느린 사진계의 ‘선생님’이다. 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