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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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별이 들려주는 이야기(마음글) 341

나 ‘자신’을 내려놓는 정원 가꾸기

나 ‘자신’을 내려놓는 정원 가꾸기 중앙일보 입력 2024.04.16 00:2 고진하 목사·시인 봄비가 내린다. 어젯밤 돌담 밑 수로에서 청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봄비를 재촉하는 예보였을까. 봄비가 내린다. 한동안 가물든 정원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어린 봄풀들을 일으켜 세우는 빗소리가 수런거린다. 비설거지는 어제 오후에 미리 끝내놓았다. 오늘은 굳이 찬비 맞으며 동네 둘레길 걸으러 나갈 일도 없고, 텃새들이나 길냥이들도 보이지 않으니 차마 끝에서 도란도란 흘러 떨어지는 물소리나 들으며 한유함을 즐기련다. 어린 봄풀 일으켜 세우는 봄비 정원 일서 맛보는 질박한 기쁨 더없는 행복 저절로 오지 않아 김지윤 기자 얼마 전 옆지기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난 올해 정원사가 될 거예요! 그런 말을 한 그녀는 며칠에..

어느 예술 후원가의 부고

어느 예술 후원가의 부고 중앙일보 입력 2024.04.05 00:46 업데이트 2024.04.05 01:30 김인혜 미술사가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던 때, 한 지긋한 연배의 의사 선생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 “요즘 화가 중에도 옛날 빈센트 반 고흐처럼 모든 열정을 그림 그리는 데만 쏟아붓고 다른 생각은 할 줄도 모르는, 그런 예술가가 있나요?” 나는 이 질문이 문득 참신하다고 느꼈다. 내게 그 대답은 당연히 “예스”인데, 이 노신사는 정말 진지하게 그 사실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 예술가가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림을 그리나. 이들은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전자를 그냥 타고난 사람들이다. 정말 좋아서, 이게 아니면 안 돼서 처박혀..

화엄매(梅)

화엄매(梅) [오후여담] 문화일보 입력 2024-03-27 11:36 이철호 논설고문 이번 봄에 SNS 친구들이 가장 자주 올려준 사진은 홍매화다. 그중 화엄사 홍매화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로부터 매화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했다. 한겨울에 눈을 맞으면서 피는 설중매가 으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하얀 꽃에 꽃받침이 녹색인 ‘청(靑)매화’를 가장 높게 쳤다.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은 오래전부터 홍매화를 최고로 쳤는데, 그런 홍매화가 슬그머니 한국에서도 인기를 끄는 것이다. 높이 9m의 ‘구례 화엄매(梅)’는 오래전부터 전국에서 알 만한 사진가들을 불러 모은 명목이었다. 조선 숙종 때 계파 선사가 심은 300년 넘는 수령에다 빼어난 자태, 천년 고찰(古刹)과 어우러진 검붉은 홑꽃잎이 압권이다. 그동안 국..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중앙일보 입력 2024.03.19 00:29 황주리 화가 조병화 시인의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라는 시 구절을 기억하면서 늘 맞는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 시 구절이 너무 당연한 말씀이 된 지 오래다. 요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또 하나의 당연한 말은 ‘결국 나의 친구는 나였던 거다’ 아닐까 싶다. 어디서나 ‘진정한 우정 같은 거 없다’ 같은 제목들이 넘쳐난다. 부담스러운 진심을 남에게 기대하지 말자는 영리해진 현대인의 마음 자세일지 모른다. 점점 소중해지는 혼자의 시간 선물인지도 모르고 보낸 날들 오늘도 나의 귀한 하루를 썼다 그림=황주리 언젠가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 지인 몇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유명 시인 J 선생님이 혼자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5시부터 7시까지의 당신

최은미의 마음 읽기 5시부터 7시까지의 당신 중앙일보 입력 2024.02.14 00:28 최은미 소설가 지인들과 신년 모임을 하던 자리에서 길흉화복을 점쳐준다는 앱을 열고 올해의 운세를 보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시기엔 불안도를 자극하거나 정신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차단하는 편인데 그날은 왠지 내키지 않았는데도 토정비결 앱을 연 후배한테 내 생년월일시를 불러주고 말았다. 2024년의 내 운세엔 안 좋은 말들이 고루 적혀 있었다. 질병과 구설수, 가까운 사람과의 반목과 손절 등등. 부정적인 말들을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재미로 생각하라거나 조심하며 지내면 된다는 말이 그다지 와 닿지 않게 된다. 여기서 어떻게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 때가 많고 일상과 일생..

모든 날, 모든 순간이 남는다

모든 날, 모든 순간이 남는다 중앙일보 입력 2024.01.31 00:21 지면보기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은 1월 어느 날! 동안거 중에 한 번은 꼭 해야 하는 포살(출가자들의 송계참회의식)에 참여했다. 스님들이 조계사 법당 안에 가득 모였다. 아는 스님, 모르는 스님, 알 듯 말 듯 낯익은 스님들이다. 반갑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 눈인사를 나누며, 나는 어서 빨리 포살이 시작되기만을 바랐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섞인 날에는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과 혹여 먼 발치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금세 마음이 흔들린다. 이윽고 염불이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엄중하다. 그러나 마음은 혼탁한 기억을 더듬느라 돌아올 줄 모른다. 산란한 마음을 과거에 버..

시인 김광섭

시인 김광섭 문화일보 입력 2024-01-29 11:46 김종호 논설고문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로 각별한 우정을 나눈 인물로는,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1904∼1977)과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도 대표적이다. 1960년대 초에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이웃해 살았다. 김환기가 미국 뉴욕에서 외롭게 지내던 시기에는 편지를 통해 교유했다. 1966년 어느 날의 김환기는 편지에서, 김광섭 시집을 내겠다는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썼다. ‘원색 석판화를 넣어 호화판 시집을 제가 다시 꾸며 보겠어요. 한 권에 3만 원짜리를 내야겠어요. 되도록이면 비싸서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싶어요. 이런 게 미운 세상에 복수가 될까.’ 김광섭은 시 ‘저녁에’를 잡지 ‘월간중앙..

대한제국의 영빈관, 덕수궁 돈덕전

대한제국의 영빈관, 덕수궁 돈덕전 중앙일보 입력 2024.01.18 00:31 덕수궁은 조선왕조의 5대 궁궐 중 하나로 꼽히고 있지만 기실은 대한제국의 황실 건축이라고 해야 맞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됨으로써 조선왕조는 그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강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종말을 고하였으니 13년간 엄연히 존재했던 황제의 나라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한제국은 무늬만 황제의 나라로 생각하며 흔히는 ‘구한말(舊韓末)’이라고 부르며 1910년을 조선왕조의 마지막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우할지언정 지워질 순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에 속절없이 당했지만 그냥 무능한 나라는 아니었다. 1893년..

吾必在汶上矣(오필재문상의)

吾必在汶上矣(오필재문상의) 중앙일보 입력 2024.01.11 00:19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권신인 대부 계씨(季氏)가 공자의 제자 민자건에게 노나라에 속한 ‘비(費)’ 땅의 읍재(邑宰:읍장)를 맡아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민자건은 전갈을 전하러 온 사자에게 “나는 읍재 벼슬에 뜻이 없으니 그대가 돌아가서 말을 잘 전하게. 만약 나를 다시 부른다면 나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의 문수(汶水) 물가로 은거해 버릴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부정한 권력자 밑에서는 어떤 벼슬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어지러운 나라에서 부귀를 누리는 사악한 권력의 부름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강직하게 거절하면 화를 입을 수 있고, 약하게 대하면 욕됨을 당할 수 있다. 이에, 민자건은 차..

행복의 의미

[백영옥의 말과 글] [336] 행복의 의미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4.01.06. 03:00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왜 사냐고 물으면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건강에서 경제적 자유까지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온다. 이럴 때 유용한 건 대조군, 즉 행복의 반대인 불행과 후회가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것이다. 어둠을 알기 위해 빛을 연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대중적인 건 ‘죽기 전 사람들이 제일 후회하는 것’의 리스트다. 리스트는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삶의 많은 부분을 너무 일만 한 것. 둘째,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 셋째, 걱정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쓴 것. 우리는 대개 성공한 커리어와 풍족한 ..

거룩한 낭비

거룩한 낭비 중앙일보 입력 2024.01.02 02:35 고진하 시인·목사 적설 20㎝, 폭설이다. 털 장화를 꺼내 신고 우선 마당과 집 앞의 도로에 길이라도 내려고 넉가래를 들고 나선다. 함박눈 덮인 도로엔 동네 작은 개들이 몰려나와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경로당으로 통하는 마을 길의 눈을 넉가래로 다 밀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돌담 밑 장독대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털어낸 그녀가 마당에서 눈덩이를 뭉쳐 굴리고 있다. “찰눈이라 잘 뭉쳐지네요.” 그래, 오늘은 하늘이 선사한 공일(空日). 담 너머로 눈 덮인 마을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속계에서 선계로 탈바꿈했구나. 저 황홀한 선계에 들어 아무 일도 않고 눈사람처럼 우두커니가 된들 누가 뭐라 하랴. 나는 동심의 눈빛 반짝이는 그녀 곁에서 눈사람 만드는 걸 거들었..

참새를 무시하는 고니

참새를 무시하는 고니 중앙일보 입력 2023.12.26 00:40 12월 나만의 하루를 찾아 한강변에 있는 서울숲을 산책했다. 원래 뚝섬경마장이 있던 자리를 개발해 만든 시민공원인데 서울에선 월드컵공원과 올림픽공원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 공원 안에 들어서면 여섯 마리 말이 경주하는 모습의 군마상(群馬像)이 보인다. 군마상 좌우에는 같은 수종의 나무들이 좌우 대칭으로 서 있어 프랑스풍을 뽐낸다. 서울숲은 나무와 호수, 풀과 습지가 잘 어우러져 공원 안으로 들어오면 이내 자연 속으로 빠져든다. 또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곤충식물원과 사슴을 사육하는 우리를 만나게 돼 동식물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든다. 사람과 가까이서 살아온 참새 천적을 피하는 독특한 생존법 작다고 참새를 깔보는 정치인 참새의 지혜를 알고..

[119] 사랑과 용서

[이동규의 두줄칼럼] [119] 사랑과 용서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입력 2023.12.15. 03:00 강한 사람들은 복수한다 더 강한 사람들은 용서한다 “용서란 때론 누구를 단죄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한 일이다.” 얼마 전 인기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다. 사랑보다 어려운 게 용서다. 용서에서 ‘서(恕)’는 ‘여(如)’와 ‘심(心)’이 합친 글자로 상대와 같은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동양에선 인간 수양의 최고 단계로 ‘서(恕)’를 꼽는다. 그러나 은인은 잊어도 원수는 절대 못 잊는 게 사람이라 복수 혈전에 열광한다. 물론 응징은 때론 중요한 저항과 교정 수단이 된다. 그러나 길게 보면 상처 준 그들을 잡고 있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오롯이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진실을 사랑하고 실수를 용서하라..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3.12.05 00: 황주리 화가 기분이 막막해지는 날이 있다. 어른이 되면 이런 기분은 없어질 줄 알았다. 세상의 논과 밭의 풍경이 놀이터였다는 내 친한 친구가 어린 시절이 늘 행복했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늘 신기한 생각이 든다. 앞이 확 트인 논밭 풍경이나 바다를 마당으로 둔 아이들은 막다른 골목을 놀이터로 둔 아이와 행복감이 다를 것도 같다. 광화문 한복판의 골목길에서 인생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그 깊은 골목의 막막함을 먼저 배웠다. 집을 나서면 골목길에 다리가 성하지 않은 아버지와 어린 딸이 동냥하고 있는 풍경, 다운 증후군을 앓는 사내아이가 웅얼거리며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던 뒷모습, 길게 느껴지던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로 한참 걸어가면 의수와 의족을..

시인 김남조의 그리움, 김세중미술관

시인 김남조의 그리움, 김세중미술관 중앙일보 입력 2023.11.17 00:15 업데이트 2023.11.17 06:18 김인혜 미술사가 지난달 김남조(1927~2023) 시인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나대로의 추모를 하고 싶어서, 효창동 김세중미술관에 다녀왔다. 이 미술관은 김남조가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을 위해 지었다. 부부가 수십년간 함께 살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미술관이다. 김남조는 1986년 작고한 남편을 기리는 일을 홀로 장장 37년간 해왔는데, 2015년에 남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지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왔다. 지난달 작고한 시인 김남조가 조각가 남편 김세중을 그리며 서울 효창동 살림집에 세운 김세중미술관. [사진 김인혜] 남편인 조각가 이름 따서 세워 옥상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