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경전, 문장 해설 거꾸로 읽는 경전, 문장 조영미(시인‧ 문학평론가) ▪꽃에서 태어난 말[言] 우리는 모두 꽃의 문을 열고 이 세상에 나온다. 당신은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어머니의 몸을 빌어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얻게 된 당신이 주위의 수많은 대상을 향해 호기심 ..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2.04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눈 눈 눈 이렇게 내리다가 곡 곡 곡 이렇게 내리다가 눅 군 녹 이렇게 내리다가 아프지 않게 둥글게 아가의 옹알이가 되어 버린다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2.02
묵념 묵념 이제 막 나뭇잎들을 떨구어내는 나무 아래서 담배를 입에 문다 오전에는 논리를 가르치고 점심 먹고 예를 가르쳤다 저 나무 적당히 몸을 휘고 바람은 발자국 남김없이 저만큼 간다 발밑에 금새 수북한 낙엽들 논리와 예를 비웃는다 다 같이 묵념!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31
허물 허물 깃발이었다 겨울이 되어야 완강해지는 나무의 팔뚝 위에 하얗게 빛나며 흔들리는 함성을 지운 깃발이었다 저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 허물을 벗은 뱀은 어디로 갔나 수없이 허물을 벗겨내어도 얼룩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주름과 주름 사이에 끼어 돋아나는 몸의 슬픔 결코 가볍..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28
느리게 느리게 우체국은 산 속 저물녘에 있다 이 가을에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 산길 초입 그리고 저물녘에서 느릿느릿 우체국을 찾아간다 블랙홀처럼 황홀한 어둠 문득 아찔한 절벽 위에 몸을 가눌 때 바위에 온 몸을 부딪치고 으깨어지면서 물은 맑고 깊어지는 흩날리는 꽃잎이다 바람은 ..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27
불의 산 불의 산 - 민둥산 억새 긴 문장 하나가 산을 오른다 꼬리에 꼬리를 문 맹목의 날들처럼 검은 상복의 일개미들의 행렬처럼 발자국들 눌리고 덮히며 수직으로 서려는 탑인 듯 길은 꿈틀거린다 고독한 여행자 같은 가을이 느릿느릿 산의 몸을 더듬을 때마다 식은 땀을 흘리는 숲을 지나서 이..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25
바람 옷 바람 옷 직각으로 떨어지는 햇살과 투명하다 못해 깨질 것 같은 옥빛 하늘이 만나면 사막이 되지 사막이 키우는 애비 없는 바람은 저 홀로 울음을 배워 갈 길을 잃은 사람의 옷이 되지 혼이 되지 가끔 꽃 피는 기색에 온 몸을 떠는 밤이 지나고 무거워진 바람의 무늬만 떨어져 전갈의 눈물..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23
황사 지난 후 황사 지난 후 눈길이 머무르는 곳 멀다 손길이 가 닿는 곳 이제는 멀다 아침이면 알게 되리라 밤새 창문에 머리 부딪치며 외우고 또 외웠던 경전의 마디 다 부질없었음을 그것이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에서 온 것임을 그 가볍고 가벼운 것이 우리의 눈을 감게 만들고 다시 한 번 세월의 더..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21
모란꽃 무늬 화병 花甁 모란꽃 무늬 화병 花甁 한 겨울 낟알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 한 가운데 외다리로 서서 잠든 두루미처럼 하얗고 목이 긴 화병이 내게 있네 영혼이 맑으면 이 생에서 저 생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나 온갖 꽃들 들여다 놓아도 화병만큼 빛나지 않네 빛의 향기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문 반..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20
제멋대로, 적당하게 제멋대로, 적당하게 사방팔방으로 천 개의 팔을 가진 길도 밤이 되면 서서히 봉오리를 오무려 집으로 돌아간다 꼬리를 감추는 짐승처럼 잔뜩 어둠을 머금어 팽팽해진 산 속으로 차곡차곡 발자국 소리 쌓여가고 문득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적막한 그대 앞에 섰을 때 그믐으로 가는 달의 ..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19
예감 예감 앞 마당 목련은 목젖까지 환히 들여다보이게 웃다 떨어지고 뒷 뜰 목련은 이제야 가슴을 부풀리고 있는 중이다 피고 지는 선후가 무슨 문제이랴 우주와 몸 섞는 오르가즘 한 번이면 미련은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꽃인데 그걸 모른다 오르가즘을 모른다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17
봄의 가면 봄의 가면 마음껏 안으라는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분명 앞에 있는 듯 싶었는데 한 걸음 내딛을 때 서늘해지는 등 뒤 서걱거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아서는 안된다 뛰어내릴까 말까 망설여지는 벼랑 앞에서 배후의 유혹을 느끼게 되지만 걸어온 생은 이미 막막한 사막의 물결에 덮여 널름거..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14
싹에 대하여 싹에 대하여 굳지 않은 땅을 골라서 지상으로 돋는 싹은 없다 머리로 딱딱한 천정을 몇 번이고 부딪고 또 부딪치면서 이윽고 물러지고 틈이 난 곳으로 머리가 솟는 순간부터 다시 싸움은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이곳은 어디인가 아무도 호명하지 않은 또 나는 누구인가 ..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4.01.12
사이 사이 사랑꽃은 일년 내내 핀다 땅에다 수없이 머리를 조아릴 뿐 난초는 몇 년에 한 번 은은한 향을 하늘에 바친다 적막을 자르는 비수처럼 초록은 날카롭다 사랑꽃과 난초 그 사이에서 평생을 헤매다 배운 말 뚝!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