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199

고철 시집 『극단적 흰빛』: 모든 슬픔을 부끄럽게 하는 시

모든 슬픔을 부끄럽게 하는 시나호열 ( 시인· 문화평론가) 모든 슬픔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복합적 감정의 유령이다. 생멸, 미래에 대한 불안, 외로움과 분노, 폭력과 갈등 등등의 부유물이기도 하다. 고철의 세 번째 시집『극단적 흰빛』은 그 슬픔의 극단을 ‘흰빛’으로 요약한다. ‘흰빛’의 사전적 의미는 ‘눈과 같이 밝고 선명한 빛깔’이지만 동시에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는 깨달음을 내포하고 있다. ‘끝닿은 낭떠러지처럼 / 한발 물러설 수 없는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 때’ (「극단적 흰빛」2연)를 마주치지 않은 사람은 ‘실감나지 않는 흰빛이 생기’는 광경을 볼 수가 없다. 고철 시인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우리들에 의한 / 전쟁을 겪었었’(「보육원 생각」부분)음에도 ‘세상은 고요하고 고요’(「보육원..

존재의1) 메멘토 모리mento mori를 탐색하는 시

존재의1) 메멘토 모리mento mori를 탐색하는 시                              나호열    오늘을 살아내면내일이 덤으로 온다고내가 나에게 주는 이 감사한 선물 2)-「덤」    오래전 「삶의 현장과 죽음의 리얼리티reaality」라는 글을 통하여 조광현 시인의 시를 조망한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 ‘시인이 내려놓은 시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풍경들은 장자의 물아쌍망관 物我雙忘觀 이나 불교의 무아론無我論, 더 나아가서 여러 종교의 내세관에 귀의하라는 메시지로 읽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시인이 의도하는 바는 공자가 설파한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생활화를 넌지시 권유하는, 삶 속에서 죽음을 명상하는 내성內省을 강조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

삶의 현장과 죽음의 리얼리티Reality

삶의 현장과 죽음의 리얼리티Reality나호열 죽음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데, 죽음이란 실제로 죽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지만, 죽음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를 입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죽은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아니다.  - 에피큐로스 Epicuros   현장現場 만큼 강열한 인상印象을 남기는 것은 없다. 인상의 힘이 강력할수록 현장의 기록은 선명한 만큼 건조해진다. 조광현 시인의 다섯 편의 시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음에도 짐짓 모르는 체 하거나, 결말을 유보하고 싶어하는 노년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경계를 환기시킨다. 그러면서 살다가 사라져야 하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

정은율 시집 『눌러주세요』 : 삶의 슬픔을 꽃으로 피우는 시

跋文  삶의 슬픔을 꽃으로 피우는 시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詩는 깨달음의 경전이 아니라가슴으로 쓰는 기도문이다   1.  시인 詩人을 일러 광인狂人이라 하기도 하고 곡비哭婢라 부르기도 한다. 광인이라 함은 시대를 앞서가는 까닭에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예지자叡智者를 말하고 곡비라 함은 말뜻 그대로 ‘대신 울어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자신의 아픔을 여러 가지 이유로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울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시인을 가인歌人이라 덧붙인다면 어떨까?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시류詩類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시가 노래가 되는, 이른바 전통 서정시는 낡은 것, 또는 시대의 흐름에 걸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가인이라 불리는 시인은 매우 드물다.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

이혜숙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자아의 탐색

시간을 되돌리는 자아의 탐색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시인이란 제1 언어와의 사랑놀이를 평생토록 지속하는 사람이다-유종호   들어가며   이혜숙 시인의 첫 시집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왜 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탐색이 필요할 것이다. 시의 정의는 어찌 보면 각각의 시인들이 펼쳐놓은 시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겠다. 대략적으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자연의 완상玩賞을 넘어 궁극적으로 시인 자신에 내포되어 있는 자아의 확고한 정립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시류詩類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혼자 떼어보는 화투놀이나 혼자 두는 독장기와 비슷하다’ (유종호)는 시 쓰기는 종종 과장된 깨달음에 경도되기도 하면서..

서용례 시집 『하늘도 가끔은 구름밥을 먹는다』: 풍경風景을 경전 經典으로 읽는 시

풍경風景을 경전 經典으로 읽는 시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들어가며   서용례 시인은 자연주의자이다. 이 말은 무조건적으로 인공人工을 반대편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공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숨결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각하는 존재(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ce)서부터 출발한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호모 루덴스 homo ludens)를 넘어서서 도구, 이를테면 AI 와 같은 기능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그를 통해 놀이의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존재 (호모 파덴스 homo padens)로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고유한 자연의 숨결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정서의 고양을 꿈꾸고 있다..

김건일 시집 『밭 만들기』(2019): 농본주의자 農本主義者의 귀거래사 歸去來辭

농본주의자 農本主義者의 귀거래사 歸去來辭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김건일 시인은 2020년 9월 작고하기 전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풀꽃의 연가(1984)』를 시작으로『뜸북새는 울지도 않았다』(1987),『꿈의 대리 경작자』(2006),『 꽃의 곁에서』(2006) 와 생전 마지막 시집『밭 만들기』(2019)를 상재한 바 있다. 월간『시문학』1973년 11월호에 이원섭, 조병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시력詩歷을 비춰볼 때 다섯 권의 시집은 과작寡作이라고 보여진다.   오랜 기간 동안 ‘광화문 사랑방 시낭송회’를 이끌고,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그의 과작이 문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온 것에 연유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시인의 과작이 시적 감성의 ..

김결 시집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 공극孔隙의 슬픔과 스며듦의 미학

공극孔隙의 슬픔과 스며듦의 미학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속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자신이 없다 김결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는 기의記意를 해체하는 독특한 발화發話를 통해 의식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기억을 더듬고 스스로를 위무하는 길을 탐색하고 있다. 마치 부손蕪村의 하이쿠 「거면居眠」, “꾸벅 졸면서/ 나에게로 숨을까/ 겨울나기여”처럼 결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생의 고독함을 이겨 내기 위해 또 다른 타자인 자신의 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독백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낡고 나는 두려워요』는 존재 간의 공극―결코 결합될 수 없는 간극―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얼마가 적당할까사랑하다가 한날한시에 같이 묻혀도 간극은 있다― 「공극」 부분 시인의 이러한 ..

선연선과善緣善果의 의미를 묻다

선연선과善緣善果의 의미를 묻다 나호열 1. 선연선과의 뜻을 직역하면 좋은 인연이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연因緣은 또 무엇인가?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 -사물의 생멸이나 어떤 사건의 진위 -로 이해할 때 우리는 불가佛家의 연기설緣起說을 떠올리게 된다. 한 마디로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며 결과인 까닭에 이러한 상호작용있어서 우열이나 승패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진상은 어떠할까? 모든 생물은 어찌 되었던 생명의 연장과 종족 보존에 전력을 다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본능적 상황을 넘어서 욕망의 가치를 넘본다. 장수長壽의 욕심을 넘어서서 부와 명예, ..

이은경 시집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사이’를 탐색하는 묵상默想의 언어

‘사이’를 탐색하는 묵상默想의 언어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귀가 순해지니 들리는 걸 다 포용하라 - 「이순 즈음에 · 1」 1.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1시 15분』(2018)에 이은 이은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번째 시집을 상재한 이후 5년이 흘렀으므로 시인에게도 심신心身의 변화가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고 그 변화의 중심에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들이 자리잡고 있음이 시집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에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이은경 시인은 이순을 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순耳順은 한 생애의 원숙기 또는 정신의 일관성을 확인하는 시기로서 급변하는 세태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분기점分岐點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지면 지나온..

김광진 시집 『낯선 곳 그리고 설렘』: 만유일체의 지혜를 묻다

만유일체의 지혜를 묻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旅行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인류의 시조들이 저 아프리카를 떠나 보다 나은 생존의 터전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간 여정도 여행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거나 성지를 찾아가는 종교적 순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동移動도 여행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호기심만큼의 두려움을 안고 겪어보지 못한 환경과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는 여행은 예기하지 못했던 문화의 충돌과 혼융을 경험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행은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행운(?)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먼 곳, 먼 길..

최수경 시집 『긍정을 걸었다』:일상에서 삶의 비의秘義를 찾다

일상에서 삶의 비의秘義를 찾다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1.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나 아무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여러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표현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를 읊조릴 수 있으나 예술가로서의 시인에게는 단순한 표현 욕구를 넘어서는 일관된 세계관, 전인미답 前人未踏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교,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을 향한 지적 탐구를 시로 환치하려는 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작 詩作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始作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완성이 있을 수 없듯이, 시인은 영원히 시인이라는 이데아를 향하여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숙희 시집 『자유를 꿈꾸는 씨앗』:세월의 풍화風化와 삶의 정화淨化

세월의 풍화風化와 삶의 정화淨化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다 불꽃과 눈송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칼릴 지브란 들어가며 인간은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단독으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까닭에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투영投影하고 그 투영을 통해서 주체적 존재임을 확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표현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자아의 심층을 은폐하는 모순적 성향을 띄게 된다. 시詩는 이와같이 표현이 의미하는 드러냄과 감춤의 줄다리기를 보여주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시에서의 표현은 일상적인 드러냄과는 다른 층위를 지닌다. 자신의 인상을 드러내는 의상이나, 장신구, 일반적인 언술과는 다른 어떤 정서의 간절함을..

김정희 시집『가방을 메고 아침을 건너간다』: 한 그루 나무에는 몇 개의 나뭇잎이 달려 있을까?

한 그루 나무에는 몇 개의 나뭇잎이 달려 있을까?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시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정민 시인 김정희 『가방을 메고 아침을 건너간다』는 김정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2015년 첫 시집『너는 봄꽃이다』펴낸 이후 2년에 한 권씩 꾸준히 시집을 상재하였으니 시인에게 시마詩魔가 깃들어있음이 틀림이 없다. 시마란 무엇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시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강렬한 충동, 표현의 열망을 뜻하는 것이다. 이 시마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옛 시론 중의 하나인 ‘시궁이후공 詩窮而後工’이다. 이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어떤 결핍의 감정이 시를 짓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마와 시궁이후공의 맥락으로 김정희 시인의..

이비단모래 시집 『꽃잠』: 슬픔의 밥으로 피워낸 꽃, 詩

슬픔의 밥으로 피워낸 꽃, 詩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들어가면서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 그러니까 2020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 시집『비단모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시집을 통독하고 난 후 ‘사랑이라는 신전을 향한 기도의 시’로 그 시집의 얼개를 조감했고, 그 끝에 시인 이비단모래를 일러 ‘망망한 사랑이라는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로 내 멋대로 명명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시집『꽃잠』을 읽는 내내 시집『비단모래』의 여러 풍경이 남긴 잔영이 겹쳐지면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가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과연 또 다른 세계란 무엇일까?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독창성과 일관성이라는, 서로 길항拮抗하는 요소를 얼마만큼 융합시키느냐에 따라 그 성취가 가늠되는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