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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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씨팔! / 배한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1. 11. 16:43

 

씨팔!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 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말한 것뿐이라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잘 사는 삶이다?

 

지난 월요일 강릉의 지인으로부터 부고장 하나를 받았습니다. “동생, 개조카가 죽었어. 눈을 뜨고 갔네.” 독신으로 반려견과 10여년 이상을 함께 했으니 얼마나 정이 들었을까요. 오랜 병치레에도 극진히 보살폈지만 끝내 명을 달리한 것입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알리는 부고였지만 개를 사람의 조카로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말끝마다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왔습니다. 자신 있고 확실하게 ‘그렇다’라고 확정하지 못하고 빠져나갈 자리를 마련하고 하지요. 혹자는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설파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냐는 넋두리가 가슴에 꽂힙니다.

비겁한 삶은 가늘고 길게 갈 수야 있겠지만 그 안에 ‘진정한 자기 삶’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묻고 싶습니다.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는 이유는 내 삶은 없고 타인의 삶만 살고 있는 어리석은 나를 향한 ‘진정한 자기 삶’이 주는 경고는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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