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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고추잠자리 / 윤강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9. 30. 14:04

고추잠자리

 

윤강로

 

 

녹슨 철조망 몇 가닥 걸린 말뚝에 고추잠자리 앉았다

 

고추잠자리는 눈 감고 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집게손가락으로 잡으려는 순간,

 

고추잠자리 살짝 떴다 놓쳤다 빈 손가락이 무안했다

 

푸른 허공에 고추잠자리 떼 휙 휙 휘파람 불면서

활공(滑空)하는 밝은 풍경,

 

고추잠자리 날개가 햇살의 살갗처럼 투명하다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놓치거나 실패하면 재빨리 체념하고 허공을 보았다

 

그렇게, 깨끗하고 배고팠다

 

나의 아름다운 실패

 

고추잠자리야

 

 

 

성공이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난 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애써 위로하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실패를 위해 사용했을까요. 끝내 성공의 그림자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흉내만 내다 스러진 자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요. 첩첩산중에 터를 잡고 자연인으로 우유자적하고 있는 자들은 산으로 들어갈 때는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성공이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난 후 주어진 여유가 곧 성공에 갈음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그치니 나무 사이로 들판으로 잠자리들이 무리지어 날기 시작합니다. 어려서부터 “햇살의 살갗” 같은 투명한 날개를 가진 잠자리를 잡으려고 얼마나 뛰어다녔습니까. 머리가 커지면서 잠자리채까지 던져놓고 세상에 널브러진 성공의 날개를 잡으려 얼마나 애쓰며 살았던가요. "무언가 놓치거나 실패하면 재빨리 체념하고 허공을 보"면서 "나의 아름다운 실패"에 대하여 그래도 교훈 하나쯤은 얻었다며 다음에는 자신 있다는 호기를 부릴 수 있었지만 그런 기회도 이젠 주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나의 아름다운 실패 // 고추잠자리”는 나의 실패를 조롱이라도 하듯 “휙 휙 휘파람 불면서 // 활공(滑空)하는 밝은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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