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巨人 작은 巨人 / 나호열 작은 그릇에는 작은 만큼만 큰 그릇에는 큰 만큼 그러나 가득차게 하소서 모자람의 욕심과 비어냄의 허탈이 오직 하나가 되게 하소서 비워져 가는 시간과 채워지는 시간이 무엇이 더 긴 것입니까 오늘은 가득 차거나 오늘은 가득 비우거나 당신은 웃고 나는 울고 빈 물.. 칼과 집 1993 2014.09.18
좌우명 좌우명 / 나호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는 생활을 속이지 말라 슬픔은 참으면 독毒이 되는 것 노여움에 겨우면 한恨이 되리니 두 주먹 불끈 쥐고 가슴을 쳐라 즐거운 날은 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찾아가는 것이리니 미래는 마약과 같이 현재를 속이기 쉬우며 모든 것 하염.. 칼과 집 1993 2014.09.14
밤에 들다 밤에 들다 / 나호열 저기, 보았으리라 절절이 녹아 내리는 가슴께 안으로 날을 세우는 은장도 기어코 밤하늘에 뽑아 던진 그믐달! 탈속을 하였다 여윈 세월과 불길을 벼리는 서늘한 피 한줌 재와 같은 빛을 뿌리며 천천히 무게를 덜어내는 저기, 살내음 가득한 새벽 물 씻는 소리! 칼과 집 1993 2014.09.13
존재와의 화해 존재와의 화해 / 나호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리 아주 먼 곳으로 더 흘러가야 하리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뉘엿뉘엿 저물어 오는 강물이 있거든 가만히 손 내밀어야 하리 헛된 모든 이름 아니라고 고개 흔든 뒤에 그래도 피어나야 할 꽃이 있어 지상의 첫 호명으로 그대를.. 칼과 집 1993 2014.09.10
칼과 집 칼과 집 / 나호열 어머니는 가슴을 앓으셨다 말씀 대신 가슴에서 못을 뽑아 방랑을 꿈꾸는 나의 옷자락에 다칠세라 여리게 여리게 박아 주셨다 (멀리는 가지 말아라) 말뚝이 되어 늘 그자리에서 오오래 서 있던 어머니, 나는 이제 바람이 되었다 함부로 촛불도 꺼뜨리고 쉽게 마음을 조각.. 칼과 집 1993 2014.09.07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 나호열 바람이 분다 금지곡같이 이리저리 몸팔러 다니는 들병이 살 부벼 뜨거운 꽃 벙글게 하려고 휘이돌아 돗자리를 펼쳐 든다 때로는 못 이기는 척 넌즈시 받아들여도 좋으련만 바늘 틈새 꼭꼭 품어 청상을 숨기듯 이름은 있으되 몸은 없고 바래져 가는 남루에 묻은 땀 냄.. 칼과 집 1993 2014.09.05
눈 · 2 눈 · 2 / 나호열 먼 길을 가는 나그네 어깨 위에 내려 앉는다 어둠이 몰려 있는 모닥불 위에 내려 앉는다 침엽수의 머리 위에도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도 내려 앉는다 상실한 기억들의 무수한 파편 눈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자신의 전생을 생각한다 칼과 집 1993 2014.09.01
廣場광장 廣場광장 / 나호열 온갖 사람들이 모여서 휴식과 평화를 즐기는 광장이 어디 여기뿐이랴 누구도 함부로 점유할 수 없는 잠시 머물다 가면 그뿐인 이 세상 시청 옥상 비둘기들이 우루루 쏟아져 내려와 모이를 쪼는 삽화 속에서 나는 우울하게 기억한다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가 누구보.. 칼과 집 1993 2014.08.31
눈 · 1 눈 · 1 / 나호열 저기를 봐 빈 가지마다 가득한 열매 눈길이 닿는 곳에 꽃인 듯 겨울나무가 울고 있잖아 대롱대롱 저 녹는 눈 눈물 자리마다 움이 트고 이파리가 돋아날 거야 저기를 봐 아름다운 눈 울고 있는 저 겨울나무의 잊혀지는 기억들 칼과 집 1993 2014.08.30
同行 / 나호열 同行 / 나호열 아직 이땅에는 옷 만드는 사람과 재봉틀이 살아 있다 아직 이 땅에는 넉넉하게 고를 수 있는 많은 옷들이 쌓여 있다 벗고, 입고 감추어지는 옷과 드러내야 하는 옷이 있다 날마다 입혀지는 옷과 스스로 가끔씩 입는 옷이 있다 별이 되는가 하면 지는 꽃과 같은 옷이 있다 선.. 칼과 집 1993 2014.08.28
구름 / 나호열 구름 / 나호열 떠도는 생각들이, 몸부림의 흔적들이, 참았던 눈물들이 구름을 만든다 구름은 무심하게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다리를 절며 제도의 길과 벽과 강을 넘어서 육신의 허물어지는 독무를 춘다 해탈이다 사랑을 지우는 구름 고통을 지우는 구름. 그리하여 망각을 지우는 구.. 칼과 집 1993 2014.08.27
잠깐 침묵 잠깐 침묵 / 나호열 꽃이 피었다 진다 등불이 흔들리다 꺼진다 물소리 흐르다 그친다 문이 열렸다 닫힌다 그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단지 빛나기 위하여 별들은 어둠이 필요하다 칼과 집 1993 2014.08.25
느티나무 / 나호열 느티나무 / 나호열 다스리지 못한 마음을 생각한다 동구밖을 생각한다 가 보지 못한 길과 마을을 생각한다 그곳에 마을이, 사람이 모르는 마음이 있었다 천 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쓰임새를 모르는 느티나무의 그늘이 한겹씩의 주름을 일으키는 파도가 되어 걸어온다 저만큼 느티나무는 .. 칼과 집 1993 2014.08.24
눈 · 3 / 나호열 눈 · 3 / 나호열 티끌 하나 만큼의 무게로 가만히 내려 앉아도 억만 겁 침묵보다도 깊이 느껴지는 사람아 티끌 하나만큼의 넓이로 숨을 듯 차지하는 마음도 넘쳐 나는 그릇의 정갈한 물만큼 부끄러워지는 사람아 그윽한 종소리의 파문처럼 그대는 어디에서 와서 날아가는 새의 흔적을 보.. 칼과 집 1993 2014.08.22
알타미라 가는 길 알타미라 가는 길 당신의 집에는 당신 혼자만이 산다 그 집의 방문객은 오직 당신뿐, 일인용 식탁과 일인용의 침실, 완벽하게 타인과 단절된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다 전화기는 오로지 외부로만 열려져 있을 뿐 아무도 당신의 비밀번호를 모르고 있다 거울이 없는 당신의 집 밀폐된 그곳에.. 칼과 집 1993 2014.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