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칼과 집 1993 77

보물찾기

보물찾기 깊은 산 속에서 보물찾기를 합니다 쓰레기 가득한 욕망으로 바위 틈새 낙엽더미 쓸데없이 나무도 흔들어 봅니다 재미라고는 하지만 눈에 불을 켠 사랍들을 여린 짐승들이 피해 갑니다 이 깊은 산속까지 사람들은 사람들만의 길을 만듭니다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힘들게 올라 왔다가 다시 힘들여 지고 갑니다 산은 다시 적막을 가득 내놓습니다,

칼과 집 1993 2021.07.04

옷과의 대화

옷과의 대화 헌 옷들이여 안녕 때는 더 이상 지워지지 않고 꽃이었고 빛나는 장식이었던 날들 얼룩이 졌다 감추고 싶을 때에도 드러내고 싶을 때에도 바깥 세상을 향하여 눈 내민 새싹처럼 그저 눈부신 창이었더니 변신을 꿈꾸는 마모된 감정은 길들여진 상처를 벗는다 옷장 속의 저 수많은 허물들 유행은 뒤바뀌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또 하나의 허물을 준비하는 늘 알몸일 뿐인 정신을 위해 헌 옷들이여 이제 안녕

칼과 집 1993 2021.06.22

하얀 손수건

하얀 손수건 그들은 가장 소중한 자신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말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맑고 깨끗한 영혼의 날개를 접었습니다 가장 쓸쓸한 날에 못견디게 그리운 날에 그래도 눈물이 나는 날에 그 손수건은 날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조그맣게 눈발처럼 흔들리는 깃발이 될 것입니다 바람도 한참 흩뿌린 후에 무늬마저 지워진 손수건은 白紙가 될 것입니다 그 백지를 들여다보며 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칼과 집 1993 2021.06.17

자판기 앞에서

자판기 앞에서 예정된 미래를 들여다보고 일찍 목숨을 끊은 사람이 부럽다 나의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내용을 망각한 사람이 나는 그립다 돌팔매질 같은 돈을 먹고 아낌없이 내주는 조건반사 이외는 배운 것이 없어 이 자리를 떠나지도 못한다 썩은 피의 아픔은 전류로 울고 오직 현세만을 더듬는 주민의 손길이 가끔식 나의 절망을 멈추게 한다 나는 나이다 적막한 기계 가끔식 오작동을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려 본다 늘 기계 앞에 선다는 느낌 때문에 그를 사랑할 수 없어!

칼과 집 1993 2021.06.12

오리털 이불

오리털이불 한결같이 입을 봉한 이불들 따스함에 깃드는 내력이 가볍게 잠 위에 얹힌다 흘러가는 청명한 물소리 풀먹인 옥양목 같은 겨울 하늘을 저어가던 끼룩대는 울음소리 안락한 잠은 갈대 기슭에 닿고 꿈 속에서 부화하는 몇 개의 알이 보인다 일렬종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눈 가린 오리들의 미래 가끔씩 봉합되지 않은 생애의 틈새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오는 깃털을 보며 없는 날개를 몸서리로 친다

칼과 집 1993 2021.06.07

알 화약처럼 폭발할 수 있는 생명만이 알을 깨고 나온다 영원히 침묵 속에 파묻혀 버린 충주 근처 돌밭에서 얻어온 돌멩이를 보면서 느끼는 섬짓한 예감 슬픔을 차단한 저 완벽한 고독 헤아릴 수 없이 할퀴고 떠밀리면서 끝내 거부한 삶의 회유 저 속엔 무엇이 있을까하고 진열장 같은 나날들 사이에서 수없이 깨진 무정란들의 껍데기들을 옷으로 입고 배회하는 나를 본다

칼과 집 1993 2021.05.19

콘텍 600

콘텍 600 흐린 생각의 한 때가 지니간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머리 속에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들 제목이 없는 시와 혀 없는 말의 꽃 울음을 감추고 추락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높은 하늘의 별들 누구의 날개 깃털처럼 흩날리는 때 아닌 눈발 수치로 빛나는 황폐한 잎새들 심지에 불을 븥인 채 발버둥친다 고통과 화해하고 싶다 늦가을의 풍경 속으로 길게 발뻗고 싶을 대 가슴에 먼저 와 닿는 병과의 화해 축축하고 곰팡내 나는 생의 내용물이 푸른 연기를 내며 사라진다 콘텍 600의 무서운 힘이다

칼과 집 1993 2021.05.16

비행기재

비행기재 옷고름 절로 풀리는 여름 한낮 무성한 풀섶을 헤치며 또아리틀듯 길이 칭칭 산을 동여맨다 읊조릴 것 같은데 산은 오르막 몸이 풀리고 핏줄은 짙푸른 힘으로 길을 절정의 저 너머로 밀어낸다 푸드득, 산을 뒤틀며 뛰쳐오르는 새들 더덕냄새 풍긴다 도라지꽃이 활짝 핀다 천궁 씨알이 알알이 배이고 나그네는 내리막길을 휘이 뒷모습만 돌아서 가고 * 비행기재 강원도 정선 땅의 높은 고개

칼과 집 1993 2021.05.09

수인선 水仁線

수인선 水仁線 수평선을 달리는 협궤열차 소래, 원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 어디에 내려도 아름다운 마을들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다를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소금기 묻어 보석처럼 들어박히는 사람들 마음에서 마음으로 갈매기 낮게 날며 부리로 물어다가 저만큼 옮겨놓는 수인선, 굴렁쇠 굴리듯 불씨를 뿌리며 해가 그 위를 달려가고 고무줄처럼 팽팽해진 바람이 수평선을 놓아 버린다

칼과 집 1993 2021.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