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 1 / 나호열 가을 편지 · 1 / 나호열 그대 생각에 가을이 깊었습니다 숨기지 못하고 물들어 가는 저 나뭇잎같이 가만히 그대 마음 가는 길에 야윈 달이 뜹니다 칼과 집 1993 2013.09.01
어떤 참회록 / 나호열 어떤 참회록 / 나호열 어둠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한 생애를 읽는다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던 상대는 무엇이었을까 작은 물방울들이 으깨어져 안개로 흐느적거리는 실존의 외길을 날마다 조금씩 읽으며 조금씩 더 잊어버리며 한 장씩 넘기면 어둠 탓으로 돌리며 짚어 내려가던 아버지의 .. 칼과 집 1993 2012.03.04
상계동 . 24 / 나호열 상계동 . 24 / 나호열 옆집 아무개씨가 이사를 간다 삼 년 동안 내왕이 없었으므로 그가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 지 알리가 없다 단지 트럭에 실리는 장농을 보며 천 만원 짜리 통영자개장이라는 수근거림에 그가 부자였자는 사실과 그런 부자와 나란히 삼 년을 살았다는데 신기함.. 칼과 집 1993 2011.12.25
상계동 . 20 상계동 . 20 / 나호열 담벼락에 기대어 귀뚜라미로 실컷 울었으면 좋겠어요 애들이 많으면 방 구하기도 수월치 않지요 시끄럽고 더군다나 우리 집엔 고삼짜리가 있거든요 단촐한 세입자를 원해요 중첩되는 두 얼굴이 적막하게 퍼져간다 모래들이 모여서 사막을 이루어 불모지로 .. 칼과 집 1993 2011.11.07
상계동 . 16 상계동 . 16 / 나호열 공단에서 흘러나온 매연이 수면제처럼 뿌려지는 상계동의 밤 한결같이 남쪽을 향하여 가슴을 연 아파트의 불빛이 용이 되어 승천하고 있다 하늘에도 빽빽한 별들의 집, 그래도 텃밭같은 나의 희망은 아직 넉넉하다 꽃이 되든지 나무를 심든지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할 씨앗을 뿌.. 칼과 집 1993 2011.09.22
상계동 . 1 상계동 . 1 / 나호열 낯선 사람들이 낯설게 살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낯선 사람들은 낯 선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묻히는 법을 배우고 낯설어져야 잠이 잘오는 병에 걸린다 앞집과 뒷집의,일층과 이층의 벽들이 동아건설 창동공장에서 실려 나온다 끊임없이 나는 어디에든 따뜻한 알을 낳고 싶다 사람.. 칼과 집 1993 2011.09.20
집, 그리고 상계동 집, 그리고 상계동 / 나호열 마음을 그냥 비우라 하셨지만 그냥 버릴 수눈 없었습니다 귀하고 아까웠던 것 다 잃어버린 후에 정녕 곡식 거두어들인 빈 들에 새롭게 돋아오르는 이름 없는 하루살이 풀꽃이 나의 몸인줄 알겠습니다 집인줄 알겠습니다 칼과 집 1993 2011.09.19
가을 편지 · 2 가을 편지 · 2 / 나호열 구월 바닷가에 써 놓은 나의 이름이 파도에 쓸려 지워지는 동안 구월 아무도 모르게 산에서는 낙엽이 진다 잊혀진 얼굴 잊혀진 이름 한아름 터지게 가슴에 안고 구월 밀물처럼 와서 창 하나를 맑게 닦아 놓고 간다 칼과 집 1993 2011.08.31
양수리에서 양수리에서 / 나호열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양수리에 온다 날갯죽지를 상한 물총새 뛰어들까 말까 망설이는 갈대숲이 귓가에 물소리를 가까이 적신다 신문지에 가득 담겼던 세상일이 푸른 리트머스 시험지에 녹아 깊이를 알 수 없는 흐름으로 덮혀 가고 가진 것 없으면서 가난해 보이지 .. 칼과 집 1993 2011.07.31
自手成家 자수성가 自手成家 자수성가 / 나호열 어쨌든 집은 튼튼해야 하며 온갖 풍상에도 견뎌야 한다고 마치 뜻을 세우고 미래를 자로 재듯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리라 호언했다 법이 바뀌고 바퀴가 없는 역사는 파괴와 건설의 널뛰기를 계속해도 어느 시대에도 변덕이 없는 집이 있다 개미떼들! 그리고 노동자들! 칼과 집 1993 2011.07.28
텃새 텃새 / 나호열 한국의 텃새 시리즈가 끝나고 곧 이어 사당동, 상계동 철거민 농성사태가 한 장면씩 잘려 나옵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나른함이 행복처럼 골고루 퍼집니다 까치는 왜 나무에 살아 하고 어린 아들이 물어 봅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새니까?) 까치는 일정한 규격의 집을 짓습니다 .. 칼과 집 1993 2011.07.25
벽제행 벽제행 / 나호열 律法과 집들이 비스듬히 기울고 있다 이제는 하늘을 기어오르든지 땅 밑으로 꺼져 가든지 푸른 한숨이 누더기 옷을 벗고 있다. 칼과 집 1993 2011.07.24
자술서 자술서 / 나호열 서울시민입니다 유목민입니다 뿌리를 내리는 일에는 정말이지 관심이 없습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도 또 겨울입니다 칼과 집 1993 2011.07.21
그리운 집 그리운 집 / 나호열 많은 사람들이 제 발로 그 속에 갇히고 있다 즐겁게 갇힌 공간 속에서 아이를 낳고 잠을 채운다 신전이 아니면 무덤일 것이다 기도하거나 조금씩 썩어가는 우~ 우~ 우 밤마다 이리떼가 울고 있다 칼과 집 1993 201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