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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어떤 바깥 / 엄원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5. 4. 14:14

 

어떤 바깥

 

엄원태

 

 

들길 옆 얕은 구덩이에 누런 인조가죽 소파가 버려져 있다 가죽코트 차림의 술 취한 살찐 사내가 길가에 쓰러져 잠든 것 같았다 소파는 고집스럽게도 꼼짝 않고 엎드린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소파도 처음엔 들판의 밤바람이 춥고 새벽이슬에 몸 적시며 서러웠을 거다 뭣보다도 자신의 처지가 당황스러웠을 게다 평생을 실내에서만 지내온 소파에게 어느 저녁 트럭에 실려 도착한 난데없이 바람 센 들판 외진 공터란 얼마나 터무니없는 장소일 것인가 ‘이건 정말 말도 안 돼!’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파는 단단히 삐친 듯 몸을 더 웅크리며 돌아앉는 거였다 한 무더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회오리치듯 몸을 뒤틀다가 어스레해지는 공중으로 흩어지고, 개밥바라기가 검붉은 구름 지평선 너머 사라졌다 이제 또 밤이 온 것이다

 

 

 

참혹함이란 경험해본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

 

직장 생활을 하다가 회사가 오너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도가 나고 어쩔 수 없는 퇴직 후 작은 회사 몇 곳을 떠돌다가 빈 몸으로 사업을 한다고 발버둥 치며 일어서보려는 찰라 IMF를 만나 나락으로 떨어졌지요.

 

나도 “처음엔 들판의 밤바람이 춥고 새벽이슬에 몸 적시며 서러웠”으며 “뭣보다도 자신의 처지가 당황스러웠”지요. 가진 것 없었지만 남은 것 다 잃고 “어느 저녁 트럭에 실려 도착한 난데없이 바람 센 들판 외진 공터란 얼마나 터무니없는 장소”였겠습니까. 내 일은 아니라고 외면하던 그 일이 급작스레 내 것으로 다가왔을 때 그 참혹함이란 경험해본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돼!’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힘이 빠진 다리를 이끌고 뒷동산을 오르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평생을 실내에서만 지내온” 것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어떤 바깥’에서도 당당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요. 이렇게 찬바람이 살갗을 스쳐 지나는 날이면 그 때가 생각납니다. 그대가 혹 “바람 센 들판 외진 공터”에 놓여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축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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