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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시래깃국 / 양문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25. 14:00

시래깃국

 

양문규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매년 12월 초가 되면 승용차 트렁크에 마대자루 서너 장과 식칼을 하나씩 넣어두고 다닙니다. 하천 언저리를 지나다 단무지 무를 추수하는 장면을 보게 되면 염치 불구 밭으로 뛰어 들어가 밭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무를 뽑아주고 무를 뽑아주는 대가로 무청을 얻어오곤 했습니다.

 

바람이 잘 드는 처마 밑에 노끈을 열 줄 정도 매고 모래흙이 간간이 묻은 무청을 털어 널고 나면 김장보다 뿌듯한 겨우살이 준비를 끝낸 듯 했습니다. 영하의 기온과 찬바람에 얼고 녹고를 반복하며 부피는 줄어들어도 제 색을 잃지 않고 말라가는 시래기를 보면서 “세상 어떤 국이 /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온 식구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잘 발효된 된장시래깃국 한 사발씩 나누며 행복한 시선을 나누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우리들 희망을 품고 사는 가슴을 서로 확인 하는 것이지요. “겨울이 점점 깊어가”는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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