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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철수의 시로 보는 세상

빌려줄 몸 한 채 / 김선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14. 13:39

 

빌려줄 몸 한 채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스스로 겉잎 되어 자기 몸을 내어 주는 희생

 

중국 무협지에서는 상대의 목숨을 얻기 위해 내 팔 한 쪽 쯤은 내 주라고 합니다.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한다는 문장에서 아차 싶었습니다.

 

당연하다 싶고 순리이다 싶은 세상의 수많은 것들의 바탕에는 스스로 겉잎 되어 자기 몸을 내어 주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지요.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나라살림까지 누군가의 희생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스스로 겉잎 되어 즐거이 자기 몸을” 희생한 분들의 피 땀의 결과가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이 땅이고 이 가정 아니겠습니까.

 

허지만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까지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 알게 된 것”이랍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생각만 가지고는 쉽게 알 수 없는 삶의 비밀들,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이 되어서야 볼 수 있는 배추의 결구(結球)처럼 삶의 결구도 한가지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보니 내 삶의 겉잎이 되어 준 삶들이 자꾸 되새겨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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