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옛길 당신에게도 아마 옛길이 있을 것입니다. 운하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피를 나눈 길들이 당신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헤어질 때에는 될 수 있으면 뒤로 돌아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 한 채로 뒷걸음을 치면서 고통스럽겠지만 조금씩 멀어져가는 당신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3
눅눅하다 눅눅하다 세월은 빠르게 가고 추억은 느리게 온다 마치 깊은 산에서 잃어버린 메아리처럼 밑창이 닳은 얼굴로 내 앞에 앉는다 혼자 듣는 음악이 식고 혼자 마시는 차가 흘러간다 느리게 낡아가는 웃음을 새장 속에서 꺼내도 날아갈 줄 모른다 어느 사람에게 추억은 사막을 펼쳐 놓거나 깊고 눅눅한 숲..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1
붉은 혀 붉은 혀 비겁하게 숨어서 아무렇지 않게 불화살을 날렸다 좌중은 일순 조용해졌다가 붉게 얼굴을 물들였다 분명히 불화살은 그들의 심장에 들어박혔을 것이다 뱀의 날름거리는 혀에 독이 있던가 하루 종일 축축해진 혀 온갖 깨끗한 것을 주워 삼키면서 더러운 말을 더 많이 내뱉는 혀 생각 같아서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1
아프리카의 눈 아프리카의 눈 아프리카의 눈은 검다 끝을 모르게 깊어져야 닿게 되는 곳 킬리만자로는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것 만년설 흰 자위 속에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온통 옥빛 하늘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의 눈은 검다 지상으로 내려올수록 몸은 격렬하게 북소리를 낸다 단순한 심장..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07
큰 물 진 뒤 큰 물 진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 다시 푸르고 햇빛은 강물에 뛰어 들어가 은빛 비늘을 반짝였다 사나운 마음이 그런 것처럼 붉은 혀 널름거리던 시간이 지나자 영영 사라져 없어질 것 같던 길이며 작은 풀꽃들 휘었던 어깨를 곧추세우고 어느 사람은 뛰고 어느 사람은 천천히 걷고 어느 사람은 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7.30
잘 가 또는 안녕 잘 가 또는 안녕 네가 떠날 때는 잘 가 라고 말해야 한다 내가 너를 떠날 때에는 짧게 안녕이라고 되내어야 한다 아니, 네가 떠날 때는 안녕이라 말하고 아니, 내가 너를 떠날 때에도 안녕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갈증으로 늘어뜨린 두레박은 아직도 깊은 너의 가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7.27
징검다리 징검다리 결코 이 작은 개울을 훌쩍 날아갈 수 없다 까짓것 빠지면 비지 가랑이나 젖고 말 일인데 물살 바라보면 어지럼증이 난다 다리 가랑이 찢어지지 않을 정도만 어른도 아이들도 폴짝거리며 건너서 간다 얼마나 우스운 모습인가 징검다리 돌은 하나씩만 디딜 수 있는 법 참새 한 마리 찌익 똥을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7.19
公山城에서 公山城에서 평생을 땅파는 일에 투신한 고고학자와 공산성에 오른다 멀리 내다보는 일이 꼭 앞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굽은 등을 바라볼 때 파묻힌 것들의 숨결을 듣는 수없이 많았던 그의 屈身을 생각한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익을 대로 익어 툭툭 눈물 떨어지던 초겨울 오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7.14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모든 경계를 머물지 않고 죽지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7.10
정선 장날 정선 장날 이제는 늙어 헤어지는 일도 섭섭하지 않은 나이 사고 싶은 것도 없고 팔아야 할 것도 없는 장터 이쯤에서 산이 높아 일찍 노을 떨구는 잊어버린 옛사랑을 문득 마주친다면 한 번 놓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낯익은 얼굴들 묵묵부답인 저 표정을 배울 수 있을까 알아도 소용..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6.24
그가 말했다 그가 말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통 같은 고독 때문에 슬프다고 그가 말했다. 황선홍 선수가 골을 넣고 세 번 손을 내저었던 것은 아내에게, 딸에게, 그리고 아들에게 보낸 자랑스런 선물이라고 벌써 사 년 전 얘기인데 티브이 화면 속에서 눈물이 울컥거릴 때였다. 마침 아무도 없는 텅 빈 오후였으..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6.07
긴 편지 긴 편지 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둥켜 않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6.04
신탄리행 신탄리행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사람 없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 없다 가슴 서늘해지는 끝이라는 말 더 이상 갈 수 없는 마지막 역에서 얼마나 나는 부끄러워지는가 온기 가득했던 한 잔의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작별의 편지 한 장 다 쓰기도 전에 이렇게 당도해버린 낯 선 곳에서 산 속으로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