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불꽃놀이 꽃은 이미 졌는데 허공은 허공으로 남았는데 두 손으로 빛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데 문득 한 순간 다가왔던 눈부심이 분수와 폭포의 내세였음을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14
흐린 날 흐린 날 아침엔 눈 뿌리고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이 모든 것이 햇살의 조화 아니면 바람의 장난이다 잎 떨군 우듬지 하나가 어깨를 칠 때 나는 창 안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차를 놓치고 내젓는 웃음으로 길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다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과 상처는 멀지 않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05
눈과 물 눈과 물 날개를 잃은 별들이 소리도 없이 돌아오는 밤 어디쯤 있나 고개 들어 보니 하염없는 꽃 그림자 눈 속으로 지네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디쯤인가 슬픔을 길어올리는 샘물이 있어 기어코 솟아오르고 마는 것인가 누가 눈이고 누가 물인가 가슴에 오래 된 바다가 있어 이제 눈물은 소금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1.07
제주기행. 4 제주기행. 4 섬 안에 섬이 있다는 말, 뼈에 닿는다 눈높이 저 너머에 있던 바다가 저녁이 되자 발밑으로 스며들더니 아예 귀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낯 선 사람들 억새가 한창이라는 山間에 몸을 맡겨두고 코 고는 소리가 한창이다 산과 바다가 몸을 섞는 모양이다 내일이면 떠날 텐데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1.01
청풍에 가다 청풍에 가다 불현듯 앞을 막아서는 안개 때문이라고 뒤늦은 발걸음 뉘우칠 수는 없겠네 한 계절 꽃 피우던 얼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씨앗 눈물 대신 발밑에 뿌려두었으니 함부로 밟아서도 성급히 손으로 거두어도 되지 않을 일 청풍은 잠시도 발길 멈추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보고..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0.30
오래된 책 오래된 책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가 지루하게 갈피 속에 숨어들어 납작해진 벌레의 상형에 얹혀있다 매일 내려 쌓이는 눈 위에 발자국처럼 길게 어디론가 마침표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쌓이는 세월보다 녹아 스며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 수심이 깊은 호수가 출렁거린다 가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0.11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죽도록 사랑한다던 여자는 편 지 한 통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소리죽여 흐르는 강물에 수 천 통의 편지를 쓰고 또 썼다네 잠들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 보다 아직 젊어 해독할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과 아직 젊어 껴안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9.09
북 북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20
풍경 속으로 풍경 속으로 사거리 껌벅이는 우리은행의 현금인출기에는 우리가 없다 사거리 건너편 국민은행에는 국민이 없다 며칠 째 참 만두 빚어 파는 푸른 트럭의 아줌마 보이지 않고 몇 년 째 신용불량자 장씨 즉석 짜장 봉고는 불법 주차 중이다 늘 막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는 구두 수선 아저씨는 오늘도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7
이상한 편지 이상한 편지 숲 속의 성에 살고 있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공주임에 틀림없다 제나는 이 세계의 암호, 염력으로 부르는 혼자만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한 줄 또는 두 줄 짜리 편지를 꼭 하루가 지나서 읽는 걸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 성은 걸어서 하루 걸리는 곳 아니면 막..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6
폭포 폭포 수 만 마리의 푸른 말들이 가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떨어질 때 그 때 그 말들은 천마가 된다 천마가 되면서 순간, 산화하는 꽃잎들을 젊은 날 우리들은 얼마나 눈부시게 바라보았던가 아무에게도 배운 적 없는 사랑의 꿈틀거림이 천 길 아래로 우리를 떠밀어내었던가 그 푸른 말들이 하염없이 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5
옛길 옛길 당신에게도 아마 옛길이 있을 것입니다. 운하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피를 나눈 길들이 당신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헤어질 때에는 될 수 있으면 뒤로 돌아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 한 채로 뒷걸음을 치면서 고통스럽겠지만 조금씩 멀어져가는 당신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3
눅눅하다 눅눅하다 세월은 빠르게 가고 추억은 느리게 온다 마치 깊은 산에서 잃어버린 메아리처럼 밑창이 닳은 얼굴로 내 앞에 앉는다 혼자 듣는 음악이 식고 혼자 마시는 차가 흘러간다 느리게 낡아가는 웃음을 새장 속에서 꺼내도 날아갈 줄 모른다 어느 사람에게 추억은 사막을 펼쳐 놓거나 깊고 눅눅한 숲..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1
붉은 혀 붉은 혀 비겁하게 숨어서 아무렇지 않게 불화살을 날렸다 좌중은 일순 조용해졌다가 붉게 얼굴을 물들였다 분명히 불화살은 그들의 심장에 들어박혔을 것이다 뱀의 날름거리는 혀에 독이 있던가 하루 종일 축축해진 혀 온갖 깨끗한 것을 주워 삼키면서 더러운 말을 더 많이 내뱉는 혀 생각 같아서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1
아프리카의 눈 아프리카의 눈 아프리카의 눈은 검다 끝을 모르게 깊어져야 닿게 되는 곳 킬리만자로는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깊게 가라앉아 있는 것 만년설 흰 자위 속에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온통 옥빛 하늘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의 눈은 검다 지상으로 내려올수록 몸은 격렬하게 북소리를 낸다 단순한 심장..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