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분신 나는 불나무이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심지를 가진 불을 토하는 나무이다. 나는 또한 불나무이다 그 많은 심지에 불을 붙이면 나는 비로소 몸을 열어 꽃으로 태어난다 당신은 따뜻한 모닥불을 원하는가 멀리서 한 눈에 길을 열어 보이는 등대를 원하는가 태어나면서 죽는 사랑을 해보았는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7
약속 약속 먼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시 먼 길을 돌아가라고 말 하는 대신 나는 그의 신발에 입맞춤 하겠네 힘든 오르막 길 이었으니 가는 길은 쉬엄쉬엄 내리막 길이라고 손 흔들어 주겠네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약속은 사전에 있는 것이네 그대가 왔던 길을 내가 갈 수는 없으..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7
선물 선물 빈 노트를 선물하고 싶어요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노트를 내가 날마다 바라보는 나무의 나뭇잎 만큼의 갈피가 담긴 빈 노트를 드리고 싶어요 날씨라든가 그 날의 기분이라든가 아니면 그 무엇이라도 좋아요 그 빈 노트를 돌려받을 수는 없어요 이미 무엇인가로 채워져 갈 빈 노트는 영원히 빈..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4
안아주기 안아주기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3
강물에 대한 예의 강물에 대한 예의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1
전등을 신봉하다 전등을 신봉하다 반짝거리는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별이 전등이 아니기 때문 수없이 깜박거리는 내 눈을 용서하는 것은 그 눈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 별이 아닌 전등이 깜박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못해 기어코 전등 갓을 뜯어내자 틈새로 들어가 죽은 수많은 날벌레들 가볍게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28
낡은 집 낡은 집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이 없이 그 집은 훌쩍 떠났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사연을 누가 알 것인가 화분 속 활엽수 한 그루 며칠 째 서성거리며 찬 바람을 맞고 있다 흘낏 흘낏 담배 피우며 말없이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비좁은 화분 속에서 손은 새파랗게 얼었고 물관에는 온통 바람이 가득..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25
사랑은 앓는 것이다 사랑은 앓는 것이다 발밑에 밟히는 나뭇잎들의, 착각이기를 바라지만 목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운명의 시간을 맞이한 저 무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억압에도 웃거나 우는 법 없이 겨울의 사전 속에 막막하게 들어와 박히는 자음들, 아직도 뇌리에서 절름거리는 발자국처럼 넘실거리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16
불꽃놀이 불꽃놀이 꽃은 이미 졌는데 허공은 허공으로 남았는데 두 손으로 빛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데 문득 한 순간 다가왔던 눈부심이 분수와 폭포의 내세였음을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14
흐린 날 흐린 날 아침엔 눈 뿌리고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이 모든 것이 햇살의 조화 아니면 바람의 장난이다 잎 떨군 우듬지 하나가 어깨를 칠 때 나는 창 안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차를 놓치고 내젓는 웃음으로 길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다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과 상처는 멀지 않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05
눈과 물 눈과 물 날개를 잃은 별들이 소리도 없이 돌아오는 밤 어디쯤 있나 고개 들어 보니 하염없는 꽃 그림자 눈 속으로 지네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디쯤인가 슬픔을 길어올리는 샘물이 있어 기어코 솟아오르고 마는 것인가 누가 눈이고 누가 물인가 가슴에 오래 된 바다가 있어 이제 눈물은 소금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1.07
제주기행. 4 제주기행. 4 섬 안에 섬이 있다는 말, 뼈에 닿는다 눈높이 저 너머에 있던 바다가 저녁이 되자 발밑으로 스며들더니 아예 귀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낯 선 사람들 억새가 한창이라는 山間에 몸을 맡겨두고 코 고는 소리가 한창이다 산과 바다가 몸을 섞는 모양이다 내일이면 떠날 텐데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1.01
청풍에 가다 청풍에 가다 불현듯 앞을 막아서는 안개 때문이라고 뒤늦은 발걸음 뉘우칠 수는 없겠네 한 계절 꽃 피우던 얼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씨앗 눈물 대신 발밑에 뿌려두었으니 함부로 밟아서도 성급히 손으로 거두어도 되지 않을 일 청풍은 잠시도 발길 멈추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보고..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0.30
오래된 책 오래된 책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가 지루하게 갈피 속에 숨어들어 납작해진 벌레의 상형에 얹혀있다 매일 내려 쌓이는 눈 위에 발자국처럼 길게 어디론가 마침표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쌓이는 세월보다 녹아 스며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 수심이 깊은 호수가 출렁거린다 가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0.11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죽도록 사랑한다던 여자는 편 지 한 통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소리죽여 흐르는 강물에 수 천 통의 편지를 쓰고 또 썼다네 잠들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 보다 아직 젊어 해독할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과 아직 젊어 껴안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