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대한 예의 강물에 대한 예의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1
전등을 신봉하다 전등을 신봉하다 반짝거리는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별이 전등이 아니기 때문 수없이 깜박거리는 내 눈을 용서하는 것은 그 눈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 별이 아닌 전등이 깜박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못해 기어코 전등 갓을 뜯어내자 틈새로 들어가 죽은 수많은 날벌레들 가볍게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28
낡은 집 낡은 집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이 없이 그 집은 훌쩍 떠났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사연을 누가 알 것인가 화분 속 활엽수 한 그루 며칠 째 서성거리며 찬 바람을 맞고 있다 흘낏 흘낏 담배 피우며 말없이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비좁은 화분 속에서 손은 새파랗게 얼었고 물관에는 온통 바람이 가득..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25
사랑은 앓는 것이다 사랑은 앓는 것이다 발밑에 밟히는 나뭇잎들의, 착각이기를 바라지만 목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운명의 시간을 맞이한 저 무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억압에도 웃거나 우는 법 없이 겨울의 사전 속에 막막하게 들어와 박히는 자음들, 아직도 뇌리에서 절름거리는 발자국처럼 넘실거리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16
불꽃놀이 불꽃놀이 꽃은 이미 졌는데 허공은 허공으로 남았는데 두 손으로 빛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데 문득 한 순간 다가왔던 눈부심이 분수와 폭포의 내세였음을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14
흐린 날 흐린 날 아침엔 눈 뿌리고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이 모든 것이 햇살의 조화 아니면 바람의 장난이다 잎 떨군 우듬지 하나가 어깨를 칠 때 나는 창 안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차를 놓치고 내젓는 웃음으로 길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다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과 상처는 멀지 않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05
눈과 물 눈과 물 날개를 잃은 별들이 소리도 없이 돌아오는 밤 어디쯤 있나 고개 들어 보니 하염없는 꽃 그림자 눈 속으로 지네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디쯤인가 슬픔을 길어올리는 샘물이 있어 기어코 솟아오르고 마는 것인가 누가 눈이고 누가 물인가 가슴에 오래 된 바다가 있어 이제 눈물은 소금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1.07
제주기행. 4 제주기행. 4 섬 안에 섬이 있다는 말, 뼈에 닿는다 눈높이 저 너머에 있던 바다가 저녁이 되자 발밑으로 스며들더니 아예 귀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낯 선 사람들 억새가 한창이라는 山間에 몸을 맡겨두고 코 고는 소리가 한창이다 산과 바다가 몸을 섞는 모양이다 내일이면 떠날 텐데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1.01
청풍에 가다 청풍에 가다 불현듯 앞을 막아서는 안개 때문이라고 뒤늦은 발걸음 뉘우칠 수는 없겠네 한 계절 꽃 피우던 얼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씨앗 눈물 대신 발밑에 뿌려두었으니 함부로 밟아서도 성급히 손으로 거두어도 되지 않을 일 청풍은 잠시도 발길 멈추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보고..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0.30
오래된 책 오래된 책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가 지루하게 갈피 속에 숨어들어 납작해진 벌레의 상형에 얹혀있다 매일 내려 쌓이는 눈 위에 발자국처럼 길게 어디론가 마침표를 끌고 가는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쌓이는 세월보다 녹아 스며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 수심이 깊은 호수가 출렁거린다 가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0.11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 스물 넷 젊은 병사는 밤이면 막사를 나와 강가로 보초를 서러 갔다네 죽도록 사랑한다던 여자는 편 지 한 통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소리죽여 흐르는 강물에 수 천 통의 편지를 쓰고 또 썼다네 잠들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 보다 아직 젊어 해독할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과 아직 젊어 껴안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9.09
북 북 ...나호열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20
풍경 속으로 풍경 속으로 사거리 껌벅이는 우리은행의 현금인출기에는 우리가 없다 사거리 건너편 국민은행에는 국민이 없다 며칠 째 참 만두 빚어 파는 푸른 트럭의 아줌마 보이지 않고 몇 년 째 신용불량자 장씨 즉석 짜장 봉고는 불법 주차 중이다 늘 막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는 구두 수선 아저씨는 오늘도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7
이상한 편지 이상한 편지 숲 속의 성에 살고 있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공주임에 틀림없다 제나는 이 세계의 암호, 염력으로 부르는 혼자만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한 줄 또는 두 줄 짜리 편지를 꼭 하루가 지나서 읽는 걸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 성은 걸어서 하루 걸리는 곳 아니면 막..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6
폭포 폭포 수 만 마리의 푸른 말들이 가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떨어질 때 그 때 그 말들은 천마가 된다 천마가 되면서 순간, 산화하는 꽃잎들을 젊은 날 우리들은 얼마나 눈부시게 바라보았던가 아무에게도 배운 적 없는 사랑의 꿈틀거림이 천 길 아래로 우리를 떠밀어내었던가 그 푸른 말들이 하염없이 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