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보름달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렇게 빛날까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03
그림 퍼즐 맞추기 그림 퍼즐 맞추기 먼저 그림을 본다 이미 선이 그어져 있는 판을 내려놓는다 헝클어진 조각 그림을 맞추기 시작한다 맞추기의 순서는 없다 나는 먼저 이미 그려진 그림을 본 적이 없다 이미 선이 그어져 있는 평평한 판이 없다 헝클어진 조각 그림이 내게는 없다 운명을 믿을 때 그림이 나타나고 평평..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31
산에 들어 산에 들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겨울 산에 들어 그 산이 품고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싶었다 직립한 나무들의 선정과 곤줄박이 같은 작은 새들의 지저귐과 얼음으로 굳어있는 말들과 낙엽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새 싹들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주인이면서 주인임을 부인하는 산과 면벽하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28
눈물이 시킨 일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26
아다지오 칸타빌레 아다지오 칸타빌레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넘어졌다 너무 멀리 내다보고 걸으면 안돼 그리고 너무 빨리 내달려서도 안돼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멀리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발이 내려앉고 나의 발이 평발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래 걸을 수 없..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14
별의 의미 별의 의미 눈빛을 쏘아 올려 눈물을 적중시킬 때 별은 비로소 별이 되는 것 스스로 이 세상에서 별이 되는 별은 없다. 참 멀다 그 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11
기억하리라 기억하리라 오래 된 마을에 사람들은 가고 공덕비만 남았다 돌이 굳다고 그 속에 새긴 허명들이 단단하겠는가 남쪽 바닷가 어느 마을의 시비처럼 나도 당신의 남쪽 바다 끝머리에 서 있고 싶다. 해풍이 덮고 노을이 쓸어주고 새들도 여린 목청 올리는 나는 당신에게 건너가는 꽃다발이 되고 싶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8
분신 분신 나는 불나무이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심지를 가진 불을 토하는 나무이다. 나는 또한 불나무이다 그 많은 심지에 불을 붙이면 나는 비로소 몸을 열어 꽃으로 태어난다 당신은 따뜻한 모닥불을 원하는가 멀리서 한 눈에 길을 열어 보이는 등대를 원하는가 태어나면서 죽는 사랑을 해보았는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7
약속 약속 먼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시 먼 길을 돌아가라고 말 하는 대신 나는 그의 신발에 입맞춤 하겠네 힘든 오르막 길 이었으니 가는 길은 쉬엄쉬엄 내리막 길이라고 손 흔들어 주겠네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약속은 사전에 있는 것이네 그대가 왔던 길을 내가 갈 수는 없으..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7
선물 선물 빈 노트를 선물하고 싶어요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노트를 내가 날마다 바라보는 나무의 나뭇잎 만큼의 갈피가 담긴 빈 노트를 드리고 싶어요 날씨라든가 그 날의 기분이라든가 아니면 그 무엇이라도 좋아요 그 빈 노트를 돌려받을 수는 없어요 이미 무엇인가로 채워져 갈 빈 노트는 영원히 빈..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4
안아주기 안아주기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3
강물에 대한 예의 강물에 대한 예의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 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1
전등을 신봉하다 전등을 신봉하다 반짝거리는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별이 전등이 아니기 때문 수없이 깜박거리는 내 눈을 용서하는 것은 그 눈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 별이 아닌 전등이 깜박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못해 기어코 전등 갓을 뜯어내자 틈새로 들어가 죽은 수많은 날벌레들 가볍게 허공으로 떨어져 내리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28
낡은 집 낡은 집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이 없이 그 집은 훌쩍 떠났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사연을 누가 알 것인가 화분 속 활엽수 한 그루 며칠 째 서성거리며 찬 바람을 맞고 있다 흘낏 흘낏 담배 피우며 말없이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비좁은 화분 속에서 손은 새파랗게 얼었고 물관에는 온통 바람이 가득..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25
사랑은 앓는 것이다 사랑은 앓는 것이다 발밑에 밟히는 나뭇잎들의, 착각이기를 바라지만 목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운명의 시간을 맞이한 저 무표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억압에도 웃거나 우는 법 없이 겨울의 사전 속에 막막하게 들어와 박히는 자음들, 아직도 뇌리에서 절름거리는 발자국처럼 넘실거리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6.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