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문 사막의 문 어제는 힘없이 초식의 어금니가 부러지고 어머니는 자꾸만 기억을 놓으신다 익숙하게 여닫던 문 삐걱거린다 안과 밖의 경계가 신기루만큼 멀다 마음의 지도는 비어 있다 그 속에 나는 구름을 그린다 헐거운, 낡아가는, 틈, 깊어지는 눈, 기다리는, 견디는, 싹, 제법 두꺼웠던 마음이 한 장씩..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25
나의 노래 나의 노래 가슴에 알을 품고 있어 누가 그런 거짓말을 내게 했나 알이 깨지고 그 때마다 가슴에 창이 하나씩 생겨나긴 했지만 나는 그 새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보듬고 왔던 것은 빈 둥지 얼음장 같은 부화되지 않은 묵언 두 팔로 허공을 끌어안을 때 일획을 그으며 내 생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과거에..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25
눈빛으로 말하다 눈빛으로 말하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 풀에 놓아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으로 듣는다 그리움은 가슴 속에..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19
눈부신 햇살 이 아침의 시 나호열(1953- ) ‘눈부신 햇살’ 입력일자:2006-06-23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18
너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는다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 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18
밤길 밤길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휘휘 저으며 간다 그의 느린 발걸음은 쫓겨가는 자의 밤을 도와 줄행랑을 치는 비겁한 사내의 초조와는 거리가 멀다 우두커니 서서 되새김질 하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신호등 앞에서도 공손하다 한 번 껌벅일 때 마다 점멸하는 몇 번의 신호를 흘려보내는 것이 마치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15
숲 숲 아빠가 말했다 우리 애는 학예회 내내 주인공 이었어요 글쎄,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였다니까요 엄마가 말했다 나무를 두 팔로 안아봐 그리고 나무에 귀를 대고 나무가 너에게 뭐라고 말하는 지 들어봐 아이가 말했다 나무가 사랑해 라고 말했어요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09
기억의 저편 기억의 저편 혀에서 태어나서 말들은 가슴으로 돌아와 쌓이거나 버려진다 독을 품은 말들은 부메랑처럼 제 가슴에 닿아 가슴을 죽이고 노래로 달려 나간 말들은 파랑새가 되어 소리가 나지 않는 생의 건반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이제는 바람이 묻어 있는 기억이 싫어 말의 씨앗을 퉤퉤 뱉어버리는 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07
보름달 보름달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렇게 빛날까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2.03
그림 퍼즐 맞추기 그림 퍼즐 맞추기 먼저 그림을 본다 이미 선이 그어져 있는 판을 내려놓는다 헝클어진 조각 그림을 맞추기 시작한다 맞추기의 순서는 없다 나는 먼저 이미 그려진 그림을 본 적이 없다 이미 선이 그어져 있는 평평한 판이 없다 헝클어진 조각 그림이 내게는 없다 운명을 믿을 때 그림이 나타나고 평평..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31
산에 들어 산에 들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겨울 산에 들어 그 산이 품고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어내고 싶었다 직립한 나무들의 선정과 곤줄박이 같은 작은 새들의 지저귐과 얼음으로 굳어있는 말들과 낙엽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새 싹들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주인이면서 주인임을 부인하는 산과 면벽하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28
눈물이 시킨 일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26
아다지오 칸타빌레 아다지오 칸타빌레 돌부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넘어졌다 너무 멀리 내다보고 걸으면 안돼 그리고 너무 빨리 내달려서도 안돼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멀리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의 발이 내려앉고 나의 발이 평발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오래 걸을 수 없..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14
별의 의미 별의 의미 눈빛을 쏘아 올려 눈물을 적중시킬 때 별은 비로소 별이 되는 것 스스로 이 세상에서 별이 되는 별은 없다. 참 멀다 그 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11
기억하리라 기억하리라 오래 된 마을에 사람들은 가고 공덕비만 남았다 돌이 굳다고 그 속에 새긴 허명들이 단단하겠는가 남쪽 바닷가 어느 마을의 시비처럼 나도 당신의 남쪽 바다 끝머리에 서 있고 싶다. 해풍이 덮고 노을이 쓸어주고 새들도 여린 목청 올리는 나는 당신에게 건너가는 꽃다발이 되고 싶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