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집 옆 집 벽에 가로 막히고 기둥으로 숨겨진 숫자로만 문을 여는 아득하게 은하계 저 건너편 먼 옆집도 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주인 몰래 들어가 낮잠도 자고 음악도 들을 수 있는 은은하게 가슴을 맞댈 수 있는 그런 먼 옆집도 있다 멀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등을 맞대지 않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옆..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22
이사 이사 강남 이 편한 세상에 그가 왔다 검은 제복 젊은 경비원이 수상한 출입자를 감시하는 정문을 지나 대리석 깔린 안마당에 좌정했다 몸이 반 쪽으로 쪼개져도 죽지 않고 용케 당진 어느 마을 송두리째 뭉글어져도 용케 살아 남았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주고 비바람 막아주며 죽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16
외설의 법칙 외설의 법칙 세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 있을까 안개 가득한 목욕탕에서 문득 다가서는 벽과 같은 등들 어린 아들에게 등을 내밀며 부끄러운 때를 벗겨내는 사내를 보며 바로 저것이 얼굴도 아니고 가슴이 아니고 저 밋밋하기 이를 데 없이 제 손이 닿을 수 없는 등짝이 수줍은 아름다움이라고 그리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15
그녀의 소설 그녀의 소설 언제부터의 동행인지 발걸음을 슬쩍 끼워 맞추며 물었다 주인공이 될 수는 없을까요 그는 산을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관령을 넘자 소금기가 섞인 어둠이 밀려오고 시종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지 모르지요 아, 그 말 슬퍼요 지나가는 바퀴, 지나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15
눈물 눈물 길에도 허방다리가 있고 나락도 있다고 하여 고개 숙이고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눈물은 꽃 지고 잎 지고 나서야 익을대로 익는 씨앗처럼 고개를 숙여야 숨을 죽였다 길은 시작도 끝도 없어 우리는 길에서 나서 길에서 죽는다고 꿈에서나 배웠을까 문득 내가 한 자리에 멈추어 서 있을 때는 누군..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03
아름다운 집 2 아름다운 집 2 - 燕谷寺 동부도 백중날 피아골 절집은 비어 있다 하릴없이 바람이 지나가는지 배롱나무는 허물 대신 붉은 꽃잎을 퉤퉤 내뱉고 누렁이는 산쪽으로 귀를 세운다 태어나면서 꽃으로 피고 살면서 꽃으로 지고 죽어 장작더미에 올라 마지막으로 훨훨 꽃으로 너울대었으니 창도 없고 문도 없..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0.28
강물 위를 걷다 강물 위를 걷다 하루종일 강물 위를 걸었는데 발바닥에 티눈이 박혔다 흘러가는 것들이 내게 남긴 발자국일까 걸으면서 걸으면서 웃는 연습 웃음이 절뚝거린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0.07
도로공사장에서의 단상 도로공사 중 타일을 드러내고 파낸 옆에는 부드러운 흙이 쌓여있다 무거운 타일과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난 뒤 싱싱한 흙의 속살 드러난다 우리 마음에도 찌꺼기 조금만 걷어내면 서로 위로하고 사랑할 저런 싱싱한 마음속살 있음을 우리 모두 잊고 사는 것이다 모르는 채 잊고 사는 것이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9.28
노고단 가는 길 노고단 가는 길 빠른 길 일부러 놓치고 오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흘러가는 냇물이 마음을 씻어주고 숲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씻어주고 비탈진 돌길 오르다 언뜻 보이는 하늘 한 자락 잡아당겨 흐르는 땀을 씻었다 화사 花蛇 한 마리 느긋하게 몸과 마음 사이를 가로질러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8.19
슈퍼맨 슈퍼맨 홀로 둥지를 지키고 있는 숫 놈 금화조에게 물 주고 모이 주고 사람 나이 칠 십 넘은 그러나 나에게는 영원히 강아지인 번개 밥 주고 물 주고 몇 년 째 꽃 피우지 않는 난 몇 촉 눈길 한 번 주고 8시 반 가까운 듯 먼 노모에게 일어나시라 전화 드리고 아침 공양이 끝나야 나는 그를 만나러 간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6.14
지도책 지도책 땅거미 지는데 어머니, 지도책 달라신다 길 눈이 어두워져 집으로 오는 길 죄다 잊어버리는데 개미꼬리만한 지명들을 밝게도 짚으신다 어디 가시게요 묻는 내가 어리석어 멋쩍게 고개 돌리면 어머니는 저만큼 세월 속에 묻혀버린 마을을 향해 등 굽은 뒷모습을 팽팽해진 활시위에 얹고 있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6.12
내세에 다녀오다 내세에 다녀오다 그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종점에서 내려 걷다 어디에선가 문득 길이 끊기면 아득하여라 절벽인듯 거대한 장벽인듯 올려 보고 내려 보아도 대책이 서지 않을 때 서둘러 애써 잊을까 발걸음 되돌리면 낭패를 맛보며 마주했던 막다른 골목 푸대자루 만한 마음 속으로 고개만 겨우 넣은 형..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6.02
폐사지에서 폐사지에서 이제는 고사리 밭이 되어버린 곳 두렁을 지나 곧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삼층 석탑 서 있다 머리에는 화관도 쓰고 가슴께에는 풍경도 멋지게 달았던 어디서나 빛나고 경배하며 주위를 맴돌았던 마음 한 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난보다 넓지 않은 몇 평의 폐허를 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5.25
화진포 바다 화진포 바다 그곳에 가서 알았다 눈 뜨고도 보지 못하고 입을 열어도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을 객창에 기대어 저 두껍고 어두운 한 권의 책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하는 동안 날은 다시 어두워졌다 수 만개의 북을 울리는, 마치 스스로 만든 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