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봄날 - 하회마을의 기억 가슴께로 스쳐 닿을 듯 하여 아득한 담장을 따라 넘을 듯 말듯 찰랑거리는 꽃울음을 훔쳤다 창공을 박차오르는 그네는 눈빛으로도 담장을 넘지 못하고 봄날은 그렇게 갔다 규방은 깊어 토닥거리는 분냄새 다듬이질 소리에 절로 배이고 앵두나무는 우물가에 심고 담에 기대어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02.19
세상의 중심 세상의 중심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소요의 산 어디쯤에 뉘엿뉘엿 자리잡은 비탈진 나무들 햇살이 꽂히는 곳이면 어디든 세상의 중심인 것을 나는 성급히 직선을 꿈꾸었다 아니면 너무 멀리 에둘러 돌아 왔다 이빨 빠진 늙은 꽃들 웃는다 중심을 향..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12.07
안개의 바다 안개의 바다 밤이 그토록 깊었던 까닭을 길을 잡고 나서야 알 것 같았다 출렁거렸고 아득한 멀미에 잠 이루지 못했던 꽃봉오리의 개화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덕산에서 면천, 면천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 꽃 향기가 빛을 내고 그 빛이 바다를 이루고 섬처럼 마을이 옆구리를 스쳐지나가고 몇 번인가 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11.27
첫 눈 첫 눈 언제였던가 이렇게 하염없이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한 생애에 기대어 소멸되어가는 발자국을 찍어대던 쓸데없는 편지는 또 몇 장 이었던가 기억의 상자 속에 가만히 손을 넣어보니 주름으로 잡히는 얼룩 서늘하게 가벼운데 그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직도 정수리 높은 가지 위에서 날지 않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11.20
우리는 어디에서 온 별이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온 별이었을까 - 이성호 군과 배지희 양의 화혼에 부쳐 나 호 열 (시인) 이 세상에서 잠깐 마주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멀리서 달려 왔을까 십 년도 잠깐이고 백년도 잠깐인데 사랑하는 일도 얼마나 벅찬 일인가 지금부터 우리는 서로의 하늘이 되는거야 늘 고개를 들어 우러르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11.13
느리게 느리게 우체국은 산 속 저물녘에 있다 이 가을에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 산길 초입 그리고 저물녘에서 느릿느릿 우체국을 찾아간다 블랙홀처럼 어둠은 황홀하다 문득 아찔한 절벽 위에 몸을 가눌 때 바위에 온 몸을 부딪치고 으깨어지면서 물은 맑고 깊어지는 흩날리는 꽃잎이다 바람은 또 이렇게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11.12
묵념 묵념 이제 막 나뭇잎들을 떨구어내는 나무 아래서 담배를 입에 문다 오전에는 논리를 가르치고 점심 먹고 예를 가르쳤다 저 나무 적당히 몸을 휘고 바람은 발자국 남김없이 저만큼 간다 발밑에 금새 수북한 낙엽들 논리와 예를 비웃는다 다 같이 묵념!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11.01
보름달 보름달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렇게 빛날까요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9.26
꽃들은 달린다 꽃들은 달린다 사람의 몸으로 천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하루의 몇 시간쯤 천사가 될 수는 있는 일 꿈이 깨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예 꿈을 꾸지 않는 일 두 평이 되지 않는 일터에서 꽃들은 달린다 운전석 옆 유리창 앞에 손톱 만한 장미꽃이 뒷 좌석 담벼락 틈새 같은 사이에는 백일홍이 내리고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9.07
흥국사에 가다 흥국사에 가다 일주문 지나 대웅보전 앞에 서도 아귀의 세상은 여전히 가깝고 새벽 도량석은 당고개를 넘지 못하고 저녁 예불 범종의 울림은 별내를 지나지 못한다 세간의 아우성 떠나는 자와 사라지는 자의 부질없는 발걸음 깨어날 시간과 잠들 시간을 분간하지 못하니 흥국사에 가도 흥국사를 만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8.30
풍경 풍경 깊은 산중 홀로 숨어 들어와 가슴으로 우는 사람들처럼 지천에 깔린 꽃들은 한결같이 바람을 가득 담고 있다 휘적휘적 앞에 가는 김남표 씨 배추농사를 짓다가 작파한 땅에 온갖 씨앗을 흩뿌렸다지 힘들게 고개 들어 보니 고산준령, 숨 헐떡이는 하늘이 가까워서 좋은데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8.28
저어새의 다리 저어새의 다리 다리를 건널 때 강물에 깊이 발목을 묻은 다리의 다리를 바라보네 무릎 꿇고 팔 들고 벌서던 어느 날 허공조차 무거운 것임을 알았는데 하마 발목을 간질이며 흘러가는 강물도 그와 같지 않으랴 무던히 걸었던 나의 다리도 이제는 어디쯤 발목을 묻어 누구의 피안과 차안을 이어줄 것인..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8.23
어느 범신론자의 고백 어느 범신론자의 고백 고해소마다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번호표를 받고 차례를 기다리다가 얌전히 불려나간다 은행에서는 돈 없음이 증명되고 병원에서는 아픈 것이 죄가 된다 솔직하게 불지 않으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저 편에서 묻는 질문에 양심은 콩알만해 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8.09
시간을 견디다 시간을 견디다 진부령 고개를 넘어오다가 짐칸에 소나무 한 그루 태운 트럭을 앞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구비를 돌 때마다 뿌리를 감싼 흙들이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습니다. 마치 제 집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발자국을 남기려는 것처럼, 눈물처럼 떨어져 내렸습니다. 늙으면 우리는 산으로 가는데 저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8.06
파문 波紋 파문 波紋 나를 보고 방긋거리는 어린 아기의 웃음이 가슴에 물컹 닿는다 말을 배우기 전에 말의 씨앗이 꽃이라는 것을 부드럽게 구름과 구름이 만나듯이 잔 물결이 일어난다 뿌리 채 고스란히 뽑혀 어디론가 높은 고개를 넘어가던 소나무의 정적이 저만큼 푸를까 이 세상의 모든 말들은 꽃에서 태어..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7.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