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적당하게 제멋대로, 적당하게 사방팔방으로 천 개의 팔을 가진 길도 밤이 되면 서서히 봉오리를 오무려 집으로 돌아간다 꼬리를 감추는 짐승처럼 잔뜩 어둠을 머금어 팽팽해진 산 속으로 차곡차곡 발자국 소리 쌓여가고 문득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적막한 그대 앞에 섰을 때 그믐으로 가는 달의 웃음이 스며..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27
눈 내린 후 눈 내린 후 죽도록 걷고 또 걸었다 티눈 박히고 뭉그러진 발 경사가 심한 비탈을 뒤우뚱거리고 벼랑 옆을 위태롭게 건너왔던 탓에 못 생긴 발 눈은 그렇게 슬프다 한 마디 단어로 빛나고 은은하고 깊은 향기를 지닌 눈보라 후의 가득한 평온 그 두텁고 보기 흉한 발에 손을 내밀어 씻기려 할 때 오히려 ..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25
바람 옷 바람 옷 직각으로 떨어지는 햇살과 투명하다 못해 깨질 것 같은 옥빛 하늘이 만나면 사막이 되지 사막이 키우는 애비 없는 바람은 저 홀로 울음을 배워 갈 길을 잃은 사람의 옷이 되지 혼이 되지 가끔 꽃 피는 기색에 온 몽을 떠는 밤이 지나고 무거워진 바람의 무늬만 떨어져 전갈의 눈물은 열병과 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23
허물 허물 깃발이었다 겨울이 되어야 완강해지는 나무의 팔뚝 위에 하얗게 빛나며 흔들리는 함성을 지운 깃발이었다 저 높은 나무를 기어올라 허물을 벗은 뱀은 어디로 갔나 수없이 허물을 벗겨내어도 얼룩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주름과 주름 사이에 끼어 돋아나는 몸의 슬픔 결코 가볍지 않을 터인데..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23
세렝게티의 추억 세렝게티의 추억 무엇으로 나를 부르던 상관이 없다 스스로 사냥을 하지 못하여 이글거리는 하늘을 배회하는 대머리 독수리 무방비로 강을 건너는 누우 떼의 발목을 잡는 흉측한 악어 게으르게 게으르게 암놈이 차려놓은 성찬에 윗자리를 차지하는 수사자 제 자식이 잡혀 먹어도 눈만 멀뚱거리는 톰..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18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신이 듣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멀리 있네 단 하나의 침으로 허공을 겨누고 밤하늘 별들이 파랗게 돋아났으나 꿀벌은 지상으로 떨어져내려 이제는 슬픔도 늙어 가슴을 잃었네 우두커니 한 사람 정류장에 서 있으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걸어라 빙하기의 지층 속..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15
독약 독약 毒藥 나란히 있다 아니 서로를 서로 속에 감추며 독도 약이 될 수 있는지 약도 독이 될 수 있는지 치사량을 가늠할 수 없다 저 붉은 사과 나는 금단의 붉음과 둥금을 입맛 다시며 절대절명의 순간을 겨누고 있다 저 원융 圓融 속에 이빨이 박히는 순간 찌르르 내 생을 가르며 지나갈 독이 든 사과..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09
옛사랑을 추억함 옛사랑을 추억함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 꽃 피고 바람 불고 속절없이 죄다 헐벗은 채로 길가에 서 있었던 때가 있었나 이제는 육탈하여 뼈 조각 몇 개 남았을 뿐인데 얇아진 가슴에 돋아오르는 밟을수록 고개 밀어 올리는 못의 숙명을 닮은 옛사랑이여 나는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을 치우지 않은 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04
폭죽 폭죽 물 같은 사람과 불 같은 사람이 만나서 물 같은 사람은 자신이 불이라 여기고 불 같은 사람은 자신이 물이라 생각하면서 결국은 물과 불이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어느 평생이 필요할까 물이 불이 되려면 흐름을 멈추어야 하고 불이 물이 되려면 눈물을 배워야 할까 육신을 바꿔 입어도 아..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03
조롱 밖의 새 조롱 밖의 새 간밤의 두통은 문을 두드리는 부리로 쪼아대는 듯한 그대의 절규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데 밖에서 열 수 밖에 없는 문고리는 팔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량의 물과 한 웅큼도 안되는 양식과 차양막 사이로 간간히 들어오는 햇빛 그대는 수인처럼 내 속에서 울었다 그 때마다 전설이 송..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03
해돋이 해돋이 다시는 아침에 눈 뜨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간절하게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 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살고 있어도 예쁜 악마같이 해는 솟아오른다 눈을 가린다고 햇빛을 막을 수 없고 저녁과 새벽 다음에는 어김없이 아침이 온다 어느 사람은 바다에서 어느 사람은 높은 산정에서 불끈 솟구치..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9.01.01
그 길 구 백 걸음 걸어 멈추는 곳 은행나무 줄지어 푸른 잎 틔어내고 한 여름 폭포처럼 매미 울음 쏟아내고 가을 깊어가자 냄새나는 눈물 방울들과 쓸어도 쓸어도 살아온 날 보다 더 많은 편지를 가슴에서 뜯어내더니 한 차례 눈 내리고 고요해진 뼈를 드러낸 은행나무 길 구 백 걸음 오가는 사람 띄엄한 밤..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24
옆 집 옆 집 벽에 가로 막히고 기둥으로 숨겨진 숫자로만 문을 여는 아득하게 은하계 저 건너편 먼 옆집도 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주인 몰래 들어가 낮잠도 자고 음악도 들을 수 있는 은은하게 가슴을 맞댈 수 있는 그런 먼 옆집도 있다 멀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등을 맞대지 않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옆..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22
이사 이사 강남 이 편한 세상에 그가 왔다 검은 제복 젊은 경비원이 수상한 출입자를 감시하는 정문을 지나 대리석 깔린 안마당에 좌정했다 몸이 반 쪽으로 쪼개져도 죽지 않고 용케 당진 어느 마을 송두리째 뭉글어져도 용케 살아 남았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주고 비바람 막아주며 죽은..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2008.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