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람 2 생각하는 사람 2 바람이 소리치는 줄 알았다 바퀴가 투덜대는 줄 알았다 접시가 깨지며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다 바람을 맞으며 아파하는 것들이 있다 접시에 닿아 먼저 깨지는 것들이 있다 바퀴에 눌리는 바닥이 있다 수동태 문장은 주어가 슬픈가 저 소리들의 주어를 슬그머니 되찾아 주고 싶은 밤 바람도, 접시도, 바퀴도 아니었던 소리의 주인은 성대가 없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8.24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구백 걸음 걸어 멈추는 곳 은행나무 줄지어 푸른 잎 틔어내고 한여름 폭포처럼 매미 울음 쏟아내고 가을 깊어가자 냄새나는 눈물방울들과 쓸어도 쓸어도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편지를 가슴에서 뜯어내더니 한 차례 눈 내리고 고요해진 뼈를 드러낸 은행나무 길 구백 걸음 오가는 사람 띄엄띄엄 밤길을 걸어 오늘은 찹쌀떡 두 개 주머니에 넣고 저 혼자 껌벅거리는 신호등 앞에 선다 배워도 모자라는 공부 때문에 지은 죄가 많아 때로는 무량하게 기대고 싶어 구백 걸음 걸어 가닿는 곳 떡 하나는 내가 먹고 너 배고프지 하며 먹다 만 떡 내밀 때 그예 목이 메어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마는 나에게는 학교이며 고해소이며 절간인 나의 어머니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8.18
몸과 살 몸과 살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_43 열은 오르는데 몸은 춥다 외로울 때 네가 왔고 괴로움에 지쳐갈 때 너는 갔다 몸은 아픈데 전언은 멀리 멀리 종소리처럼 혼자 걸어서 갔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8.10
저 너머 저 너머 ‘저 너머’라는 말이 가슴속에 있다. 눈길이 간신히 닿았다가 스러지는 곳에서 태어나는 그 말은 목젖에 젖다가 다시 스러지는 그 말은 어디에든 착하다. 주어가 되지 못한 야윈 어깨에 슬며시 얹혀지는 온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손의 용도 와 같이 드러나지 않아 오직 넉넉한 거리에 날 세워두는‘저너머’그 말이 아직 환하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8.04
뿔 뿔 초식의 질긴 기억이 스멀스멀 몸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날카로운 발톱도 치명의 송곳니도 갖지 못한 쫓기는 자의 슬픔 그 슬픔을 용서하지 못할 때 불끈 뿔은 솟구쳐 오른다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된 분노는 높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가 되거나 못으로 온몸에 박히는 뿔이 된다 나도 뿔났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31
물든다는 말 물든다는 말 용광로 같은 가슴에서 떨어져 내린 모음이 사라진 자음처럼 잎 하나 빈 의자에 앉아 있다 청춘을 지나며 무엇이 부끄러웠는지 저 혼자 붉어져 가을을 지나고 있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27
낙엽 낙엽 공손히 허공에 내민 손은 한 번도 움켜 쥔 적이 없는 손은 깃발처럼 휘날리던 손은 벌레 먹어 구멍 송송 뚫린 손은 그윽하게 저물어가는 어는 가슴읅 닮은 손수건 같은 손은 이제 새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한다 낙엽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21
파티,파리, 빨리 파티,파리, 빨리 파티에 가실래요? 와인이 있고 흥겨운 노래도 있어요 길 잃을 염려는 없어요 원점 회귀의 개선문 앞은 사통팔달이에요 쟌느가 말했다. 영어선생은 파티가 아니라 파리로 발음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었다. 쟌느는 파리가 아니라 빨히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면박을 주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난 파리가 싫어 네가 파리야 쟌느가 내 몸을 후려쳤다. 파티가 아니라 파리라니까! 쟌느가 소리쳤다 파리가 아니라 빨희라니까 나는 더듬거리며 빨리라고 외쳤다. 무한증식의 저 빌어먹을 파리떼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15
봄비 봄비 알몸으로 오는 이여 맨발로 달려오는 이여 굳게 닫힌 문고리를 가만 만져보고 돌아가는 이여 돌아가기 아쉬워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여 발자국 소리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면 문득 뒤돌아 초록 웃음을 보여주는 이여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06
꽃, 꽃, 꼿꼿이 꽃, 꽃, 꼿꼿이 문득, 귀가 환해진다 가을이 가기 전에 봄이 오기 전에 둔덕에 가득 피어오르는 연둣빛 함성 이름을 얻기도 전에 그들은 풀의 조각조각으로 그러나 모두 모여 환하게 어깨동무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러면, 나는, 앙진 가슴에 와락와락 달겨드는 그 물결에 눈길만 아득해지는 것이니 먼 산 봉수대 구름 몇 송이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03
새벽강 새벽강 새벽이 오면 강은 스스로 나무가 된다 빛깔도 향기도 없는 수만 송이의 꽃을 피우는 나무 어둠을 딛고 아스라이 바라보는 수묵의 너른 품 정갈한 백자를 담은 얼굴은 기쁨과 슬픔을 곱게 풀어 놓은 듯 하다 밤을 오래 걸어와 새벽을 응시하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주는 강의 천불천탑 나무들의 수만 송이 꽃들의 책갈피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면 온몸에 물의 전생을 담은 너를 만난다 가보지 않은 고향을 그리워하듯 홀연히 사라지는 나무 속으로 나 또한 깊이 젖는다 새벽이 진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7.01
구름에게 구름에게 구름이 내게 왔다 아니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희미한 입술 문장이 될 듯 모여지다가 휘리릭 새떼처럼 흩어지는 낱말들 그 낱말들에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달아주니 와르르 눈물로 쏟아지는데 그 눈물 속에 초원이 보이고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저녁이 보인다 구름이 내게 왔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름을 부르면 사슴도 오고 꽃도 벙근다 구름의 화원에 뛰어든 저녁 해 아, 눈부셔라 한 송이 여인이 붉게 타오른다, 와인 한 잔의 구름 긴 머리의 구름이 오늘 내게로 왔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6.30
땅에게 바침 땅에게 바침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ㄴ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6.22
거문고의 노래 3 -백제금동대향로 거문고의 노래 3 -백제금동대향로 저 저어기 허공을 딛고 피어나는 꽃이려니 텅 터어엉 가슴을 비우고 그 위에 바람 몇 줄 걸어놓으면 꽃신 신고 사뿐히 화르르 날아오르는 새떼이려니 계면조의 하늘을 자진모리로 떠가는 구름 인적은 없어도 늘 부화를 기다리는 슬픔으로 따듯한 불빛 꽃 진 자리에 마음을 얹듯이 내려 앉는다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6.19
거문고의 노래 2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울 밖에 서 있겠네 내밀한 그 마음이 궁금하여 키를 세우고 또 세우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열하고도 여덟이나 아홉이 되었을 때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려 당신이라는 사람을 안을 수가 없었네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마음에 둥지를 틀겠네 봄이 다 가기 전에 꿈이 사라질까 자고 자고 또 자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스물하고도 또 스물을 더했을 때 나는 인생을 다 살아버려 날개없는 나비가 되었네 당신이라는 사람이 아직도 잊회지 않아 그 오동나무와 그 누에고치는 속이 텅 비고 바람보다 가는 실이 되어 거문고가 되었네 만리 길의 첫 걸음처럼 막막하여 낮게 하르르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는 꽃잎의 한숨처럼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네고 싶은 노래는 아직 아무도 부르지..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