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68

모시 한 필

모시 한 필 모시 한 필 속에는 서해바다 들고 나는 바람이 금강을 타고 오르는 여름이 있다 키만큼 자란 모시풀을 베고 삼 개월을 지나는 동안 아홉 번의 끈질긴 손길을 주고받는 아낙네들의 거친 숨소리가 베틀에 얽히는 것을 슬그머니 두레의 따스한 마음도 따라 얹힌다 모시 한 필 속에는 서천의 나지막한 순한 하늘이 숨어 있고 우리네 어머니의 감춰진 눈물과 땀방울이 하얗게 물들어 있다 구름 한 조각보다 가볍고 바람 한 줄보다 팽팽한 세모시 한 필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묵언의 편지 곱디고와 아직도 펼쳐보지 못했다

내력

내력 뻐꾸기가 봄을 산에 옮겨놓았다 팔이 긴 울음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는 밤 산은 연두 소리로 차곡차곡 채워지고 붉은머리오목눈이가 탁란하는 동안 뻐꾸기는 제 목소리를 제 알에 숨겨놓는다 새끼를 품을 수 없어 슬픈 그저 엄마 여기 있어 엄마 여기 있어 온 산에 가득 차면 푸드득 초록 날개가 뻗쳐오른다 북이 된 산은 뻐꾸기의 목소리로 가득 차고 이윽고 여름이 온다

오대산 선재(善財)길

오대산 선재(善財)길 어디에 닿을지 뻔히 알면서도 길을 묻는다 어느 사람은 비로(毘)로 가는 중이라고 했고 어느 사람은 내세(來世)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혼자 걸으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의 목소리를 벗할 수 있고 여럿이 걸으면 푸른 하늘이 팔랑거리는 빨랫줄처럼 출렁거리는 손길을 마주잡을 수 있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전나무들 도저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냇물이 이십 리 길인데 선지식(善知識)을 멀리 찾는 어리석음으로 이미 저녁이다 어느 사람은 오르는 길이 마땅하다 하고 어느 사람은 내려가는 길이 가볍다 하였다 아무렴 어때! 오대산 선재길은 내가 만든 내 마음의 길

우리 동네 마을버스 1119번

우리 동네 마을버스 1119번 마을버스는 이 마을 저 골목을 둘러서 가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지 한순간이면 깨달을 인생을 평생을 살아야 겨우 닿는 것처럼 빠르게 가는 법이 없지 나는 지금 종점으로 가고 있어 4·19 묘지가 종점이지 타는 사람보다 내리는 사람이 많아 빈 배가 빈 배를 싣고 가는 것이지 아직 몇 정거장 더 남았어 잠깐이지만 꿈 좀 꾸어야겠어 현실을 벗어나는 꿈길 그래도 1119번 마을버스는 달리고 달리고 있어

오래된 밥 2

오래된 밥 2 세탁기가 투덜대는 동안 포트에선 물이 씩씩거리고 있고 밥솥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 취사가 끝났다고 밥을 잘 섞어달라고 내게 말했다 열기가 사라져버린 심장과 얼룩 하나 지우지 못하는 팔뚝은 또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이 버린 옷처럼 혼자 식어가는 커피처럼 나는 오래된 밥이다 슬그머니 곁자리에 있어도 아무도 허기를 느끼지 않는 오래된 밥 다시 들판으로 나갈 수 없지만 세탁기 속에 몸을 헹굴 수 없지만 따스함을 기억하는 밥

오래된 밥 1

오래된 밥 1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밥이 있다 한 숟갈만 먹어도 배부른 밥이 있다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그 옛날부터 그러나 한걸음 내딛으면 아득해지는 길의 시작으로부터 나를 키워온 눈물 같은 것 기울어진 식탁에 혼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면 딱딱하게 풀이 죽은 채 식을 대로 식어버린 추억 같은 밥 한밤중에 일어나 흘러가는 강물에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은 손 같은 밥 아, 빈 그릇에 가득한 안녕이라는 오래된 밥

돌아오지 않는 것들

돌아오지 않는 것들 —옛 구둔역*에서 마냥 서 있을 뿐인데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묻는다 상행은 어제로 뻗어 있고 하행은 내일로 열려져 있는데 소실점 밖에서 열차시간표를 읽고 있을 뿐인데 이제 이 길에는 잡초가 망각의 이름을 대신할 것이다 누가 떠나고 누가 기다리는가 혼자 경전을 세워가는 탑 같은 느티나무 아래 무너지지 않겠다는 듯 플라스틱 의자는 두 개 세월이 비껴가듯 우리는 나란히 저 의자에 마주하지 못하리 굳은을 구둔으로 읽는 정지해버린 추억을 읽는 영혼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 어떤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어 아름다움을 배우는 곳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에 소재한 중앙선의 폐역이다. 1940년 개설되었으나 중앙선의 선로 변경으로 폐역이 되었다.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 있는 사내 2

서 있는 사내 2 쑥부쟁이 칡덩굴 얽히고설키며 철 따라 피고 지던 꽃들과 풀들의 흙을 덜어내어 논을 만들고 밭을 일구다가 꿈같은 속 세의 끄트머리라고 당간을 세우고 금천을 넘게 하더니 어느날 불타고 무너져 내려 인의도덕을 서원하는 마당이 되더니 다시 부수고 그 자리에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는 전답이 되었으니 이 조화는 사람의 일인가 세월의 장난인가 큰길 오가던 사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후세에 비석으로 한을 달랜들 금 가고 마음 모서리 떨어져 나간 채 서있는 저 사내의 삭은 가슴만 하겠는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

서 있는 사내 1

서 있는 사내 1 고령에서 가야 넘어가는 고갯길에 그가 서 있다. 절벽 같은 뒷모습을 남긴 채 저 아래 아득한 세상으로 투신이라도 할 듯이 잠시 망설이는 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릴 듯도 한데 간신히 지탱해온 몸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를 일 그러나 아직도 저 차가운 돌의 미소 속에는 용암이 들끓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날개 가 떨어져 나가고 비록 남루 한 벌로 세상을 지나왔지만 이 쑥굴헝이 되어버린 맹지에 버리고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버리지는 않았다. 무너져 내릴지언정 굴신하지 못하는 탑이라는 이름의 사내

바위 속에서

바위 속에서 —봉황리 마애불* 단단하고 어두운 방이었어 창이 없는 그런 방 억만 겁이 지났나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 누군가 석류꽃이 피고 있다고 말하더군 불쑥 바위 속에서 내가 튀어나왔어 강열한 눈빛 여름 햇살 때문에 세상에! 반쯤만 몸이 나왔어 당신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나는 부처가 아니야 돌의 옷을 입고 돌의 미소를 지닌 그래도 나는 사내야 *2004년 보물 제1401호로 지정된, 삼국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마애 불 群이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산 27번지에 있다

소품들

소품들 헝클어진 머리칼, 입술이 깨진 찻잔, 다리가 부러진 밥상인지 책상인지 용도가 불분명한 저 자세, 주인공이 분노에 가득차서 제멋대로 휘젓고 내버린 풍경의, 저 소품들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간이 온몸에 퍼진 균열의 미소를 담을 수 없어서 나는 모른 척 이 생을 지나가기로 했다. 안녕이란 말은 늘 몇 구비 휘인 먼 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