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68

늙어간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 어느 물길을 거슬러 오르나봐 강원도쯤 강원도하고도 정선쯤 정선하고도 아우라지쯤 가닿으려나 봐 한동안 머물렀던 양수의 기억 그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하늘의 치마끈이 풀렸는지 그 물빛 그 내음이 흠씬 물들어 있나봐 몸을 웅크린 저 조약돌들 나보다 먼저 거슬러 올라온 연어 떼인 듯 여생(餘生)과 후일(後日)이 같은 뜻이라는 걸 문득 바라보는 아우라지의 저녁쯤

비가(悲歌)

비가(悲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그 노래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길을 지우고 난 후에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슬픈가 슬퍼서 외로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디쯤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토마스네 집

토마스네 집 배부른 개가 되기를 거부한 늑대가 그립다 숲에서 버림받고 외톨이인지 떠돌이인지 눈 안에 가득 푸른 눈물을 담은 늑대가 가끔 아주 가끔 내 영혼의 유배지에서 울고 가는 것을 그저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부끄러운 상처를 더듬을지라도 기꺼이 굶주림마저 나눠가지려던 마음이 그리워지면 어느새 사막이 내게로 왔다 버림받은 늑대가 왔다

수오재(守吾齋)*를 찾아가다

수오재(守吾齋)*를 찾아가다 마음에서 발이 자란다 어디든 가보자고 어디든 여기보다 못하겠느냐고 마음에 발이 수없이 돋아나도 그러나 마음은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나무가 된다 봄이면 몸서리치는 꽃으로 울고 여름이면 무성히 창문을 열어놓다가 가을이면 메마른 눈물을 발등에 죄 없이 덮고 덮는다 마음은 채찍 같은 마파람을 맞으며 겨울의 긴 꿈을 꾼다 마음은 결국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정약현의 당호(堂號).

꽃짐

꽃짐 자전거 한 대가 소실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긴 언덕길인지 비틀, 기우뚱거리며 너른 들판이 얹혀져 있는지 등짐이 가득하다 이 세상 향기로운 꽃 모두 빛깔 고운 꽃 모두 기쁨과 설렘을 건네주러 가는 저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노동인가 소실점 속으로 아득히 비틀거리며 기우뚱거리며 노을을 가득 지고 가는 저 生이 궁금하다

극락(極樂)

극락(極樂) 내 나이 묻지 마라 내 몸을 스쳐간 수많은 인연 세찬 바람으로 다가왔으나 아직 나는 푸르다 휘어질 대로 휘어졌어도 아직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언젠가 지상을 떠나는 날 묵언의 향 내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서산 부석사 극락전 옆에는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수령이 궁금하 였으나 곧 그 질문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말문을 닫았다. 2014년 4월 15일에 사진을 찍고, 2014년 11월 4일에는 바라만 보았다

겨울비

겨울비 오랜만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나 보다 저 푸스무레하고 아스무레한 턱없이 부족하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몇 숟갈 들 수 있는 눈빛으로 한 봉지 쌀을 일고 있나 보다 눈물도 가난해져서 뜨물같이 얼굴 가리며 내리는 비 내 몸의 꽃눈을 짚으며 멀리서 오는 사람처럼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는 소리 남은 허기는 아직 남은 따스한 냄새로 채우고 조금씩 귀가 커져가는 듯한 이월의 예감처럼 떠오를 듯 말 듯 아련한 이름처럼 아직도 남은 반만큼의 허기로 겨울비 내린다

노을 앞에서

노을 앞에서 다가서면 다가선 만큼 물러서는 사람이기에 그저 바라본다 저 속에 밤새워 쓴 편지가 불타고 있고 끝내 보여주지 않은 심장의 화로가 있다 수만 송이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오르는 저 짧은 시간의 행간에 바라본다 그 한마디 말씀을 던져놓으면 노을은 긴 손을 내밀어 머리맡의 등불을 돋을 하룻밤의 꿈을 건네주고 길 없는 길 너머로 사라진다 다가서면 다가선 만큼 물러서는 사람이기에 그저 바라본다

내가 하는 일

내가 하는 일 오욕칠정을 담은 심장이 여의주만 한 둥근 한 덩어리로 응집되려면 삼백하고도 육십오일을 기다려야 한다 뜨겁고도 붉은 늙은 풍선 하나가 부풀어 올라 바닷가에서 산정에서 감옥의 철창 너머로 이 세상 어디에서나 잘 보이는 곳을 밤새 달려 희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헌 희망을 나눠주는 일 일몰의 한순간을 위하여 삼백육십오일을 혼자 뜨거운 남자 지금은 노을을 등에 담고 어두운 뭍을 향하여 제부도 바닷길을 달리고 있다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나를 부르면 그가 온다 절뚝이며 먼 길을 꼬리로 달고 초식도 아니고 육식도 아닌 퇴화의 이빨을 드러내며 오는 사람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굶주린 사막의 아가리 속으로 기꺼이 사라지는 수많은 그는 내가 호명했던 나 어둡고 긴 골목 같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그믐달처럼 어딘가를 향해 흔들었던 깃발이었다가 껍데기만 남은 그림자를 홑이불로 덮는다 한낮에는 갈 길이 멀고 밤이 깊으면 머무를 곳이 두렵다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심장을 닮은 석류가 그예 울음을 터뜨렸을 때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마지막 기차가 남긴 발자국을 생각한다 붉어서 슬픈 심장의 고동 소리가 남긴 폐역의 녹슬어가는 철로와 인적 끊긴 대합실 안으로 몸을 비틀어 꽃을 피운 칡넝쿨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고요가 저리할까 스스로 뛰어내려 흙에 눈물을 묻는 석류처럼 오늘 또 한 사람 가슴이 붉다

가을을 지나는 법

가을을 지나는 법 가을은 느린 호흡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도보여행자 점자를 더듬듯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오래 마음 물들이다가 툭 투우욱 떨어지는 눈물같이 곁을 스치며 지나간다 망설이며 기다렸던 해후의 목멘 짧은 문장은 그새 잊어버리고 내 몸에 던져진 자음 몇 개를 또 어디에 숨겨야 하나 야윈 외투 같은 그림자를 앞세우고 길 없는 길을 걸어가는 가을 도보여행자 이제 남은 것은 채 한 토막이 남지 않은 생의 촛불 바람이라는 모음 맑다

자낙스

자낙스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문이 없어 불안은 유령이 되어 떠돌다 어디선가 끊어진 회로를 갉아먹고 있는지 발자국 소리 갉아먹고 있는지 한숨 내쉬는 소리 깜빡거리다 어둠에 묻혀버린다 안으로 잠긴 문을 뜯어내려는지 두통이 따라오고 이 윽고 부작용에 대한 설명문이 퇴화한 개미의 눈을 요구한다 경계는 처음부터 없는 환상이니 과다복용하지 말 것 내가 너 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