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이 세상에서가장슬픈노래 68

거문고의 노래 1

거문고의 노래 1 백년 후면 넉넉하게 닿을 수 있겠다 망각보다 늦게 당도한 세월이 수축과 팽창을 거듭한 끝에 빅뱅 이전으로 돌아간 심장을 애도하는 동안 수화로 들어야 하는 노래가 있다 떨쳐내지 못하는 전생의 피 증발되지 않는 살의 향기로 꽃핀 악보 사막이란 말은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사막을 키우고 있다 사막을 건너가는 꿈이 넉잠을 자는 동안 바람은 고치에서 풀려나오며 오동나무에 날개를 달았다 짧은 생은 촘촘한 기억의 나이테로 현을 묶고 백년쯤 지난 발자국으로 술대를 젓는 늦가을을 기다리는가 아, 거문고의 긴 날숨이 텅 빈 오동나무의 가슴을 베고 아, 거문고의 깊은 들숨이 나비가 되지 못한 음을 짚어낼 때 나는 다만 첫발을 딛는 꽃잎의 발자국 소리를 사막에 담을 뿐 수화로 그 노래를 ..

모텔 아도니스

모텔 아도니스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소년도 아니고 청년도 아닌 다가서면 누구나 붉음으로 물들어 버릴 것 같은 길가의 저 사내 때문에 신호등이 없어도 멈칫 서게 되는 비밀 하나를 감추고 가을을 지나간다 비밀은 나눌 수 없는 혼자 만의 것 잘 익은 와인의 속내를 닮은 마지막 잎새가 되는 것 사랑이란 오해의 바람 한 줄 누군가의 영혼에 잠시 닿았다 사라지는 물결 몇 마디 진흙탕 속에서 연꽂이 피어나고 연꽃이 져 가는 그와 같은 비밀을 나누어주고 있는 저 사내

가을과 술

가을과 술 자, 한 잔 주시게 이제야 가슴이 텅 비었으니 가득 담아 주시게 이 가을에 술 아닌 것이 어디 있겠나 저기, 호수를 닮은 하늘 한 모금 공연스레 음표 하나를 떨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귀소를 서두르는 기러기 떼도 이 가슴에 들어오면 술이 되는구나 한 모금 술에도 취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서산으로 걸어가는 조각달도 부풀었다가는 사그라지는 것을 자, 한 잔 주시게 이제야 가슴이 텅 비었으니 뒤돌아가는 그대 발자국 소리라도 남겨주시게

후일담(後日譚)

후일담(後日譚) 어떤 사람은 나를 쇼핑카트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짐수레라고 나를 불렀다 무엇이라 불리든 그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기꺼이 몸을 열었다 내 몸에 부려지는 저 욕망들은 또 어디서 해체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더 이상 열매 맺지 못하는 살구나무 아래 버려져 있다 탈출이 곧 유배가 되는 한 장의 꿈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는 너무 멀리 왔다 누가 나를 호명할까봐 멀리 왔다 뼛속에서 한낮에는 매미가 울었고 밤에는 귀뚜라미가 우는 풀섶 어디쯤

시인의 말

시인의 말 천만 번 겨루어 천 번 만 번 진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일 사랑을 주는 일 천 번 만 번 내주어도 천 번 만 번 부족하지 않은 가난해지지 않는 일 사랑을 주는 일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끝끝내 남아 있을 우리들의 양식 이제야 그 씨앗을 얻어 동토에 심으려 한다 눈물 한 방울 백년 뒤에라도 좋다 피어주기만 한다면 2017년 7월 無籬齋에서 나호열

나호열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나호열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 2017년 7월 29일 발행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 64편이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 신간 소개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자기만의 세계를 꾸준히 축조해온 나호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