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봄날 - 하회마을의 기억 가슴께로 스쳐 닿을 듯 하여 아득한 담장을 따라 넘을 듯 말듯 찰랑거리는 꽃울음을 훔쳤다 창공을 박차오르는 그네는 눈빛으로도 담장을 넘지 못하고 봄날은 그렇게 갔다 규방은 깊어 토닥거리는 분냄새 다듬이질 소리에 절로 배이고 앵두나무는 우물가에 심고 ..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12.15
천원의 행복 천원의 행복 만약이 아니라 정말로 주머니 속에는 천 원 지폐 한 장 뿐이었다. 푸르렀으나 가볍고 불온했던 청춘의 얄팍한 가슴처럼 구겨진 천원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타야할 버스는 몇 마장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데, 버스 삯이 천 원인데, 세월은 일방통행 편도일 뿐인데. 마지막..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12.10
한아름 한아름 왼 손과 오른 손이 닿으면 보이지 않는 원이 하나 생깁니다 찬 밥 한 덩이 얻어들고 두 손 안에 감쌌던 밥그릇 그만큼 자라고 또 자라 이 세상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또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한번은 누구나 얼싸 안았던 그가 떠나고 떠나지 않고 기다려주는 나무의 체온을 느낄..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12.09
K K 아침 여섯 시 선잠에서 깨어난 그는 악몽을 벗는다 가끔 자신이 매일 죽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어제의 허물을 벗지 못한 날은 지나가는 행인 1도 아니고 짚신 신고 화살 맞고 쓰러진 포졸도 아닌 채로 하염없이 정류장에서 대기 중이다. 가슴에 일련 번호를 단 버스들은 어디론..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12.08
말 배우기 말 배우기 세 살 배기 유빈이가 한창 말을 배운다 봄 나무에 잎 돋아나듯 허공을 휘어잡는 가지처럼 단어가 늘고 문장이 이어진다 아, 예뻐라 곰도 알고 여우도 알고 나무도 알아 한 팔로 번쩍 안아 밤하늘을 보여주니 달도 가르키고 별도 안다 조금 있으면 숲도 알고 하늘도 알고 말 속에..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9.26
사랑해요 사랑해요 당신이 듣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멀리 있네 단 하나의 침으로 허공을 겨누고 밤하늘 별들이 파랗게 돋아났으나 꿀벌은 지상으로 떨어져내려 이제는 슬픔도 늙어 가슴을 잃었네 우두커니 한 사람 정류장에 서 있으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걸어라 빙하..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8.25
옛사랑을 추억함 옛사랑을 추억함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 꽃 피고 바람 불고 속절없이 죄다 헐벗은 채로 길가에 서 있었던 때가 있었나 이제는 육탈하여 뼈 조각 몇 개 남았을 뿐인데 얇아진 가슴에 돋아오르는 밟을수록 고개 밀어 올리는 못의 숙명을 닮은 옛사랑이여 나는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을 치..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8.23
눈빛으로 말하다 눈빛으로 말하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 풀에 놓아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독약같은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으로 듣는..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8.17
창 창 창을 갖고 싶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 그 틈으로 하늘을 보았다. 아니 처음에는 길고 높은 벽이 보였다. 그 벽에 다시 구멍을 내자 하늘은 실핏줄같은 강 내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마음의 창에 가득 번져오르던 울음 빛은 흘러가야만 보인다 창과 구멍을 구별하지 못한..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8.04
그림자 놀이 그림자 놀이 미안하다 초대 받지 않았지만 나는 이곳에 왔다 내 자리가 없으므로 나는 서 있거나 늘 떠돌아야 했다 가끔 호명을 하면 먼 곳의 나무가 흔들리고 불빛이 가물거리다가 흐느끼듯 꺼지곤 했다 그림자는 우울하다 벗어버린 옷에는 빛이 빚으로 남아 있어 얼룩을 지우지 못한다..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7.31
약속 약속 먼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시 먼 길을 돌아가라고 말 하는 대신 나는 그의 신발에 입맞춤 하겠네 힘든 오르막 길 이었으니 가는 길은 쉬엄쉬엄 내리막 길이라고 손 흔들어 주겠네 지키지 못할 것이기에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기에 약속은 사전에 있는 것이네 그대가 왔던 길을 내가 ..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7.29
분리 수거 분리 수거 자루 앞에 붙여진 팻말대로 넣어 주세요 유리병, 파트 병, 깡통, 스티로폼, 플라스틱 무엇인가 담겨져 있던 용기들이 미련없이 버려지는 어느 하루 어디다 넣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머리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가 황급히 빠져나가는 손 뭉클하게 가슴을 건드린다 병은 병대로 깡..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7.27
이방인 이방인 못을 친다 다 흘러가 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남은 이름이라도 걸어두려는지 못을 칠 때 마다 울음이 쿵쾅거린다 아직 견고하게 남은 벽이 그렇지 않으면 자꾸 뭉툭해져 튀어오르는 못이 일으키는 시퍼런 안광 새들의 지저귐을 읽어내지 못하면서 꽃들이 개화하는 고통을 듣지..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7.26
풍경 풍경 풍경 너머에 또 하나의 풍경은 눈물 걸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봄날 아스라이 한 마장쯤 걸어 들어가도 아늑할 그 품 속 손을 넣으면 완강한 벽 하나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휠체어에 몸을 기대어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노인이 휠체어에 앉은 노파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어머니,..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7.25
지도책 지도책 땅거미 지는데 어머니, 지도책 달라신다 길 눈이 어두워져 집으로 오는 길 죄다 잊어버리는데 개미꼬리만한 지명들을 밝게도 짚으신다 어디 가시게요 묻는 내가 어리석어 멋쩍게 고개 돌리면 어머니는 저만큼 세월 속에 묻혀버린 마을을 향해 등 굽은 뒷모습을 팽팽해진 활시위.. 눈물이 시킨 일 2011 2013.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