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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집 1993

어떤 참회록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3. 4. 23:38

어떤 참회록 / 나호열

 

 

 

어둠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한 생애를 읽는다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던
상대는 무엇이었을까
작은 물방울들이 으깨어져
안개로 흐느적거리는
실존의 외길을
날마다 조금씩 읽으며
조금씩 더 잊어버리며
한 장씩 넘기면
어둠 탓으로 돌리며 짚어 내려가던
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하다
낡고 얇아져 바람 불 때마다
가슴에서 산란히 서걱거리는
한 권의 비망록
세월 탓이겠지 듬벙듬벙
넘겨가던 마지막 갈피를 넘기고
나는 문득 소리죽여 눈물을 쏟는다
아무것도 없었구나
평생 동안 이룬 일 없다고
다 소용 없다고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참회의 무게
눈물 속으로 언뜻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버지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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