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소파 오래된 소파 / 나호열 편하게 잠드는 것 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오래된 소파에서 선 잠을 잔다 눌려져야만 튕겨오르는 스프링, 그 위를 덮은 가죽은 너덜해지고 색깔은 바랜 웃음으로 희미해지고 어떤 무게에도 스프링은 이제 튕겨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조금씩 뼈를 드러내는 반발의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0.13
패랭이꽃을 보다 패랭이꽃을 보다 / 나호열 나사를 푼다 몸을 허문다 그 많던 꿈들 다 어디로 갔나 띄엄띄엄 눈 속으로 들어와 기어코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나사를 버린다 한 번 풀리고 나면 다시 조일 수 없는 그리움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길 끝나고도 한참 잊은 무덤가에 주저앉아서 무더..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0.05
안개꽃, 꽃 안개 안개꽃, 꽃 안개 / 나호열 한아름의 꽃을 안개라 하고 안개 그 앞에서는 꽃이라 우겨대는 이쁜 사람들 틈에 꽃을 보아도 꽃으로 보이지 않고 불현듯 내 앞에 서는 안개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갑자기 시력이 떨어진 그 틈에 눈물이 떨어진다 꽃이 되기 위하여 안개가 되기 위하여 소금..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0.03
돌멩이의 꿈 돌멩이의 꿈 / 나호열 성난 발길질이라도 좋아 아무데나 내동댕쳐진대도 따뜻한 체온, 그 손길에 닿을 수 있다면 날아가는 그 순간 짧은 꿈을 꾸는 나는 새가 되지 풀섶에 떨어진대도 물수제비 다 건너가지 못하는 강물 속에서라도 또 한 번의 손길을 기다리는 깊은 꿈을 가질 수 있다면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0.01
촛불을 켜다 촛불을 켜다 / 나호열 밝고 맑은 날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길 잃어 힘들어질 때 저는 비로소 당신 곁으로 달려가 당신의 빌 밑에 엎드리는 작은 불빛입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는 예비합니다 밝고 맑은 날에도 저는 영혼의 심지를 올려 어둡고 비바람 치는 날이..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9.25
꽃 피고, 꽃 지고 꽃 피고, 꽃 지고 / 나호열 꽃이란 꽃을 다 좋아할 수는 없지만 꽃이란 꽃이 죄다 아름다운 것은 피거나 지거나 그 사이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을 하나의 얼굴로도 충분히 물의 깊이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꽃 같은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물 흐르듯 같이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9.18
나비, 환생 나비, 환생 / 나호열 아침 커피는 진하게 마시면 안돼 커다란 머그 잔에 우유랑 같이 섞어서 뜨거운 커피에 약간의 아이리시크림을 넣어 향을 내고 살짝 구운 토스트 그리고 빠알간 사과 한 알 곁들이고 덜 깬 눈으로 바라보는 햇살 사이로 혼자만의 아침 식탁은 시작된다 어디쯤에서 바..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9.16
이 메일 이 메일 / 나호열 이 메일에는 보관함이 있고 휴지통이 있다 휴지통은 쓸데없는 것, 별 볼일 없는 것 용도 폐기된 것들을 버리는 것이지만 떄로는 소중하고, 기억에 남아 있어야 할 것도 버려야할 때가 있다 휴지통은 뚜껑이 있거나 아예 뚜껑조차 없이 무조건 열려 있다 휴지통조차도..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9.13
그 겨울의 찻집 그 겨울의 찻집 / 나호열 이 새벽에 떠나가는 사람이 많구나 돌아가는 사람이 많구나 초점을 잃은 채 불빛은 유리잔 부딪는 소리로 흩어지고 겨울의 찻집에서 그에게 전화를 건다 지친 나그네가 되어 두드리는 문의 저 편에서 꽃다발을 들고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데 그는 늘 시린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9.12
귀인貴人을 기다리며 귀인貴人을 기다리며 / 나호열 당신에게 귀인이 찾아올 것입니다 아무리 꼭꼭 잠구어도 마음 시린 바람은 틈새로 스며들었고 꽃들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날 이후부터 문을 열어 두었다 바람과 먼지가 제멋대로 끼여들었다 갈증을 가득 안은 채 사막을 건너가는 사람 주지도 않고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9.09
밤에 쓰는 편지 밤에 쓰는 편지 / 나호열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 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8.26
이 메일, 별에서 별까지 이 메일, 별에서 별까지 / 나호열 그가 잠든 시간에 조심조심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무거운 짐 돌덩이에 눌린 꿈속을 내가 헤맬 때 그는 벌써 창문을 열고 침엽수림을 건너온 아침 햇살을 방안 가득 채운다 그의 집과 나의 집은 얼마나 가까운지 먼지 깜박거리는 화면 속으로 사라..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8.24
제 1부 첫날 밤 / 나호열 불을 끄세요, 짙은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내 모습을 바라보아 주세요, 사르르 물 흘러가는 소리, 부끄러움으로 신발 길게 끄을고 가는 숲 속으로 발자국 따라오세요. 작은 불씨 하나를 태풍 앞에 던진다. 단단히 결박시킨 신경의 작은 배들, 부동의 신념 같은 나무들이 신..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8.23
시인의 말 [나호열 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시인의 말 더하는 일 보다 덜어내는 일이 어렵다.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빚으로 남아 미움만 키워 온 것 같다.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무서운 일은 세상에 적의를 품는 일이다. 먹구름 한 장씩 뜯어내듯이 가슴을 열고 그저 하늘을 바라본다. 흰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