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눈꽃 / 나호열 미안하다 네 머리에 네 어깨에 내려앉아 나도 꽃이라고 잠들어 있는 동안 네 팔에서 네 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람까지 붙잡았던 일 그러나 이제는 눈꽃 이슬로 눈물로 낮게 낮게 네 발 밑에 엎드린 까닭에 푸른 힘으로 너는 웃고 있구나 나는 기쁘구나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10
꽃다발을 버리다 꽃다발을 버리다 / 나호열 그가 좋아하는 한 묶음의 꽃다발 그의 가슴에 안겨드리고 싶어서 온 천지를 헤매었다 모래 사막을 바라보던 눈에는,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허둥대던 손으로는 그 꽃은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훤히 보이는데 때 묻은 손길이나마 가지런히 모으면 그게 꽃..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08
바람으로 달려가 바람으로 달려가 / 나호열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속력을 낼수록 정면으로 다가가서 더욱 거세지는 힘 그렇게 바람은 소멸을 향하여 줄기차게 뛰어간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나의 배후는 바람으로 바람으로 그대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달리기를 해 보면 안다 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람..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07
가까운 듯, 먼 듯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어제는 눈 내리고 오늘은 바람 몹시 불었다고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나지막한 음성에 놀라 창 밖을 보니 백운대, 인수봉이 가까이 와 있다 늘 마주하는 이웃이지만 언제나 찾아가는 일은 나의 몫 한 구비 돌아야 또 한 구비 보여주는 생은 힘들게 아름다워 휘..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05
다인이라는 사람 다인이라는 사람 / 나호열 다인이 누구냐고 물으셨지요 무슨 다 자를 쓰느냐고 물으셨지요 다인이 누구냐고 되물었지요 차 다 자가 아니냐고 되물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흔적이 아니냐고 물으셨지요 타인의 체취가 남아 있다고 물으셨지요 다인이 아무도 아니었다면 어떻게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04
내 마음의 벽화. 5 / 나호열 내 마음의 벽화. 5 / 나호열 좋은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산을 가득 품은 적막이 그 모습 드러내지 않듯이 좋은 그림은 귀로 들어야 하는 법이다 뻐꾸기는 뻐꾸기를 향하여 개구리는 개구리를 향하여 매미는 매미를 향하여 한 목숨 긴 목청을 뽑아내는데 누가 그들이 울고 있다고 말할..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03
내 마음의 벽화. 4 내 마음의 벽화. 4 / 나호열 이상하다 손에 온기가 남아 있다 누군가가 잡아주었던 향기 이상하다 모래 부서져내리는 가슴에 밤 길잡이 별이 달려 있다 이상하다 오래 전에 떠나왔던 나의 방에 누군가가 다녀갔다 선지자들은 왜 벽에 대고 기도를 했을까 잡을 수 없는 이데아는 등 뒤의 햇..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2.02
내 마음의 벽화. 3 내 마음의 벽화. 3 / 나호열 얼만큼의 깊이로 마음에 못을 박아야할 지 모른다 그림 하나를 걸어두려고 못질은 계속되지만 완강하게 밀쳐버리는 그 무엇이 있어 튕겨나오는 작은 불꽃들 마음 아프게 못질을 하지 않으면 걸 수 없는 그림이 있어 미소짓는 그 눈빛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30
내 마음의 벽화. 2 내 마음의 벽화. 2 / 나호열 글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말인 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말이 바람인 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나는 글을 안다, 그림이 말이 아닌 줄 나는 안다 말이 바람이 아닌 줄 나는 안다 그러므로 그 벽화는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내게 말을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29
내 마음의 벽화. 1 / 나호열 내 마음의 벽화. 1 / 나호열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 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다가 가끔 눈길이 가면 푸른 하늘 마을로 가는 오솔길 밭가는 농부와 소 텅 빈 여백과 먹빛만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듯이 내가 어디 있나 길 잃고 두리번..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28
밤길 밤길 / 나호열 조심스레 뒤를 바라본다 따라오는 사람 없어도 흐트러진 발자국 가지런히 해 놓고 막다른 골목에는 말뚝도 세워 놓는다 늘 하루의 반을 먼저 걸어가야 하는 나는 얼굴 보여주지 않는 시간 앞에 고개 돌리고 말지만 뒷모습은 거울로 비워두고 싶다 밤길 걸어가면서 먼저 돌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26
일방통행 일방통행 / 나호열 갈 수는 있는데 되돌아 올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이 가다가 막혀도 되돌아 올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이 꽃이 피어야 아름다운 나무와 빈 몸이어야 아름다운 나무 사이에 바람이 먼저 구비쳐 달려가 꽃 떨어지고 낙엽 물들고 한 손 가득히 담아올리는 시간의 향기 샤넬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24
시작법詩作法 / 나호열 시작법詩作法 / 나호열 할 말이 많다 푸른 하늘에 찍힌 새의 발자국 사막에 부는 바람의 얼굴 달빛 한 장 깔고 달빛 한 장 덮고 잠든 마음을 그려내려고 가슴에서 뽑아내는 독침 그 말을 버리려고 육중한 침묵 앞에 무릎 꿇기 직전 그 한 마디 외마디 비명을 찾으려고 말을 불러모은다 안..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21
비 오시는 날에 비 오시는 날에 / 나호열 그럴걸 진작 그럴걸 마른 가슴 그예 보자고 하더니 ! 그 한 마디로도 나는 푸른 깃발을 손 흔들고 만다 참을 수 없는 뭉게 구름을 닮은 목마름은 너를 향하여 귀 세운 ? 그럴걸 진작 그럴걸 내게로 다가오는 발자국이 청 보리밭을 가득 안은 강물인 것을 출렁출렁 ..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20
말에 대하여 말에 대하여 / 나호열 심지에 불을 붙인 폭약처럼 말이 달려간다 초원이란 초원을 다 달려서 철창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져간다 도망치기 위해서나 도망치는 가녀린 목숨을 물어뜯기 위해서 날랜 걸음이라면 말은 왜 스스로 결박을 지우고 머리에 피 흘리며 수인囚人이 되었는가 못 견디.. 그리움의저수지엔물길이 없디2001 2012.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