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611

음력 8월 1일

음력 8월 1일 무수히 손길이 얹혀지고 지워진 손잡이에 아직 체온이 남아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문의 흔적을 차가운 쇠붙이에 남기고 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제 몸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나비를 기억하지 않는 꽃처럼 나는 숙성을 모른다 익어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몸을 발효하는 술처럼 오래 기다릴 수도 없다 침묵을 지우개로 지우면 곧 삭아버릴 것 같은 시간의 뼈가 일 년 전 신문 기사로 환생하는 밤 숙성과 성숙이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 하던 한 생을 꾸짖는 듯하다 다시올 2021년 가을호

이름을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몇잎 붉게 피어난다 이제는 옛집으로 남은 사람아 끝내 종착역은 더 멀리 떠나 내 몸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어둠을 걸어 닿으리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끝끝내 피어있는 동백아 가여운 내 몸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깃든 장항선 철길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2021 년 서천문협 시

초원으로의 초대

초원으로의 초대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아무도 잡으려 하지 않는 저 바람이 사실은 초원에서 탈출한 말들이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질주가 포획을 두려워하는 공포로부터의 몸부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시구는 말의 말이면서 제 몸을 분쇄하여 초언을 탈출한 바람의 연역 저 붉은 신호등 앞에선 말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니 넘어질 듯 뒷발로 서서 앞다리를 손이라고 우기는 저 안간 힘이라니 시와 문화 2021 겨울호

풍경과 배경

풍경과 배경 누군가의 뒤에 서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듯 감싸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말표 고무신 260

강원도 홍천 어느 농부의 신발 말표 고무신 260 일주일에 한 번 산길 거슬러 오는 만물트럭 아저씨가 너를 데려다주었어 말표 흰 고무신 260 산 첩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이곳에서 몇날며칠을 달려도 닿지 못하는 지평선을 향해 내 꿈은 말이 되어보는 것 이었어 나도 말이 없지만 너도 말이 없지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없이 그저 흙에 머리를 조아릴 때 내 못난 발을 감싸주는 물컹하게 질긴 너는 나의 신이야 * 월간 중앙 2021년 9월호

강아지풀에 묻다

강아지풀에 묻다 무심히 풀도 꽃도 아닌 채로 아니, 풀이면서 꽃도 피우면서 한해살이면 너끈하다고 더 바랄 것 없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여기까지 왔다 무심히 없으면서 있는 척은 너무 쉬워 무심히 있으면서도 없는 척 하기는 너무 어려워 가까이 다가온 너에게는 어쩔 수없어 나는 그만 꼬리를 흔들어대지 나이는 묻지 않기로!

석등에 기대어

석등에 기대어 초여름보다는 애써 늦봄이라 하자 소나기는 말고 눈물이 아니라고 우겨도 좋을 눈썹 가까이 적시는 가랑비라 하자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아침보다는 기다리는 이 없어도 돌아가는 마음이 앞서는 저녁 어스름이라 하자 마음이 하냥 깊어져야 만나는 개선사지 꽃대궁만 키를 세우고 피어나지 않는 꽃 그 앞에 서면 꽃은 피는 것이 아니라 창을 여는 것이라고 우겨도 좋겠다 시방 十方을 한 눈에 담고 제 그림자를 옷깃으로 날리는 꿈을 잊지 않았느냐고 화창 花窓에 어리는 혼잣말 어디에도 세월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 더 살고 싶은 외로움을 손 잡아주는 그 어디쯤 나도 네가 되어 있는 것이다 * 개선사지 : 전남 담양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절터 * 2020 대한문학에 발표 개선사지 석등

추암에서

추암에서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어떤 거만함도, 위세도 멀리서 달려와 발 밑에 부서지는 포말에 불과한 것임을 모르는 채 깨닫게 된다.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보지 않으려해도 볼 수 밖에 없는 수평선을 보며 위태로운 줄타기의 광대가 되는 자신을 떠올리거나 수평선의 끝을 잡고 줄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무의식적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고무줄처럼 수평선을 끌어당기고 싶다면 아직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좀 더 살아야하는 것이다. 2015.07.18 동해시 추암 해변에서

이름을 부르다

이름을 부르다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어도 마음 밖으로 어찌 보낼 수 있으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때 나를 호명하면 장항선이 달려오고 바다에 가닿는 언덕 등 뒤로 엄동의 동백 몇잎 붉게 피어난다 이제는 옛집으로 남은 사람아 끝내 종착역은 더 멀리 떠나 내 몸을 내리지 못할지라도 나는 어둠을 걸어 닿으리라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끝끝내 피어있는 동백아 가여운 내 몸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내 몸에 깃든 장항선 철길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서천문인협회 2021

진화론을 읽는 밤

진화론을 읽는 밤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여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 말 그렇게 믿어왔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의 조롱으로 메아리 친다 다시 나를 저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삵에게 쫒기며 도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 만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새가 되리라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두레문학 2020년 여름호 엄블레라 2021 창간호 재수록

비애에 대하여

비애에 대하여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뻐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머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토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 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엄불레라 창간호 (2021)

화병

화병 내 몸엔 개화의 순간이 새겨진 꽃 문양 문신이 있다 깨지거나 버려질까 울컥거리는 두려움과 불안의 소멸은 몸과 함께 순장될 것이기에 그저 얌전히 당신의 손길을 바루는 일 뿐이다 뿌리가 잘린 채 가슴에 꽂히는 꽃 그림자가 출렁거리고 나는 그저 어딘가에 서 있을테지 의식없이 내뿜는 향기와 흐트러진 자태를 즐기는 당신의 눈길이 사선으로 빗겨가고 있을 때에도 오직 흙과 불의 혼으로 기억하는 나만의 오르가즘이 피어나고 있음을

폭포의 꿈

폭포의 꿈 나는 폭포를 사랑해 아니 나는 폭포와 같은 사랑을 사랑해 저 단호한 번지 점프 차갑고 정갈한 저 얼굴을 어떻게 일획의 붓으로 하얗게 그리고 말겠어 당신은 꿈으로 웃고 있는데 한 줄기 바람이 와르르 늦은 봄날의 벚꽃 잎으로 화폭을 채우네 손길이 닿지 않는 어드메쯤에서 나는 다시 당신을 그리네 하늘과 맞닿은 고향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수 만 마리의 열목어가 이룩하는 용오름 속에 나는 선녀의 옷을 감춘 나무꾼을 그려 넣네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폭포는 하늘을 향해 가는 사다리 나는 폭포를 사랑하네 아니 나는 아무도 모르는 폭포의 꿈을 사랑하네 시현실 2021 여름호

여름 생각

여름 생각 옛 마당에 숨어있던 채송화가 고개를 들면 여름이었다 댓돌 밑에 죄 없이 벌 서는 아이 모양 납짝 엎드려 있어도 붉은 꽃 쉴 새 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옛 마당에 개망초가 키를 세우면 여름이었다 빈 땅만 있으면 창궐하는 역병처럼 잡초가 되는 개망초를 마음 가득 채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내게 당도했다 여름인 것이다 시현실 2021 여름호